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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당 손처눌, 대구 최초의 ‘연경서원’을 이끌다
모당 손처눌, 대구 최초의 ‘연경서원’을 이끌다
  • 유무수
  • 승인 2022.12.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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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모당일기』 김형수 외 4인 지음 | 은행나무 | 244쪽

임진왜란으로 붕괴한 향교 재건에 박차
사대부 학문 공동체 이루는 토대로 기능

이 책은 일직 손씨 대구 종중에서 한국국학진흥연구원에 기탁한 『모당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연구원에서는 한문학, 역사학, 철학, 민속학 연구팀을 구성하여 학제간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이자 병참기지였던 대구는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지역사회를 유지하던 물적기반이 무너졌고 민중들의 삶은 크게 피폐해졌다. 대규모 전쟁의 상황에서 의병활동을 이끌었던 사림 세력은 임진왜란 후의 혼란상 극복에도 적극 나섰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공적인 교육기관인 향교의 재건과 같은 교육의 진흥이었다. 그 중심에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재야의 지식인이었던 모당(慕堂) 손처눌(1553∼1634)이 있었다. 손처눌은 48세에서 78세까지 『모당일기』를 썼다.

한강(寒岡) 정구(1543∼1620)의 학맥에 속하는 서사원과 손처눌 등은 선조 31년(1598) 10월부터 전란으로 붕괴한 향교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재건작업은 1608년까지 계속됐다. 1607년 신임 부사 정경세가 부임하고 새로 지은 향교의 사당에서 여러 유생과 함께 선현의 상에 배알하는 의례를 치렀다. 향교를 운영하는 규칙도 제정했다. 향교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손처눌은 매일 건설현장에 찾아가서 진행과정을 점검했다. 향교는 학교의 건물을 짓는 것이며, 조선국가의 이념을 담은 공간이었다. 의례과정에서 사대부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했다. 수령은 향교를 매개로 지역의 사대부와 교류했다. 공공기관으로 국가와 지역 사대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 것이다.

서원 역시 향교와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대구 향교 대성전 공사를 마무리한 후 손처눌과 지역 사대부는 대구 지역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 건물을 정비하고 사당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연경서원은 퇴계의 학문적 정체성을 담고자 했고 향교와 함께 대구 지역 사대부의 학문 공동체를 이루는 토대로 기능했다. 서원은 사대부들이 설립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선현의 학문을 되새기는 학업의 장이었다. 

1605년 서사원과 손처눌이 주도한 대구의 강회(講會)는 공교육 기관인 향교나 향촌의 사학인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강회가 아니라 제향을 위한 의례적 공간이 없는 서재(書齋)를 중심으로 모인 강학활동이었다. 대구문회는 △통강 중심의 집단적 강학 △개인별 수준에 따른 눈높이 교육과 자기주도적 학습 △일과와 조약을 엄격하게 정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 실천의 내면화를 지향했다. 또한 1582년 당시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가 왕명에 따라 공교육의 교육방침으로 정한 『학교모범』의 독서가이드 라인을 적극 수용했다. 따라서 『소학』을 근간으로 하여 『대학』과 『근사록』으로 규모를 정하며 사서를 중심으로 오경까지 경전을 강독하고 『사기』와 성리서를 통해 뜻을 넓히고 식견을 가다듬고자 했다. 1604년 손처눌은 학생들이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공부가 진전되자 학령 12조를 기록해서 강당 좌우에 걸어두었고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스승과 생도가 절하고 서로 인사하는 예를 의례화했다.

일기를 쓸 때 손처눌은 경물에 대한 감정, 특정 저작 및 사건에 대한 견해, 화답,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주 한시를 지었다. 화분에 심은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절개를 함께 하는 벗(節友)’이라고 표현했다. 모당의 한시 짓기는 일상의 기록에 가까웠다. 손처눌은 적절한 시구를 찾아내기 위해 자주 고민했노라고 시고(詩苦)를 토로하기도 했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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