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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齋人이 더 어울렸던 혁명가
書齋人이 더 어울렸던 혁명가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5.1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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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6) 다케우치 미노루가 본 모택동

▲모택동 동상에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

 

역사의 도시 광주에서 호남성 수도인 長沙로 갔다. 대장정의 시발지인 瑞金이나 남창을 갈까 했으나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관광지인 桂林도 들릴 겸, 모택동 혁명의 발진 기지라 할 호남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장사는 모택동이 중학교를 다닌 곳이다. 호남성 제1사범학교가 모택동의 최종 학력이다. 그는 당대의 다른 혁명동지들처럼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지로 유학을 다녀오거나 국내의 군사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獨學徒와 篤學派로 입신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독학의 이유를, 그의 게으름과 외국어에 대한 무능력과 결부시키는 견해도 있다.

張戎과 존 헐리데이 공저인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황의방 외 번역, 까치)이란 책을 보면, 그동안 세간에 알려진 모택동의 위대성과 신비성이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음을 본다. 초창기 급진주의자나 공산주의 지향의 동지들처럼 그가 프랑스나 소련으로 가지 않은 것은, “육체노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모택동이 알파벳도 익히지 못하자 다른 학생들이 그를 놀려댔고, 그러자 그는 홧김에 수업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라고 묘사된 것처럼 어학에 소질이 없었던 탓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진위야 어찌 되었든, 해외 유학파도 아니고, 군인으로 경력을 쌓은 것도 아닌 모택동은 이례적이며 매우 특출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는 일생동안 司馬光의 資治通鑒을 열일곱 번이나 탐독하며 帝王學의 교본으로 삼았고, 兵書에도 아주 밝았다고 한다. 六韜와 三略, 孫子와 吳子의 병법에 정통했으며, 해방전쟁과 항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그의 군사 전략 역시 오로지 그의 독학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명한 중국인 물리학자 錢三强과 모택동이 나눈 대화가 있다. ‘모택동과 중국철학전통(毛澤東與中國哲學傳統)’이란 책에서 저자 畢劍橫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55년 1월에는 ‘原子가 발전할 수 있는가’에 관한 1차 토론회에 참석하여 모택동은 전 삼강에게 이렇게 물었다. “量子와 電子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당시의 자연과학은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전 삼강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양자와 中性子가 원자핵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모택동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중성자, 전자는 당연히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대립 통일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실험에서는 증명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실험 여건이 향상되면 그것들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게 중명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러분은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믿지 않더라도 나는 믿습니다”라고 유머러스하게 말하였다.

아마도 저자는 이 글을 통해 모택동의 사색과 식견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택동을 높이 추켜세우는 이러한 글들은 중국 문헌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아주 최근에도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는 ‘중국의 대국주의 경계론’이란 시론(문화일보 5월 2일자)에서, 1950년대 중반에 모택동은, 50년 후인 21세기에 들어서서 중국은 강대한 사회주의 공업국이 되고, 그때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의 ‘대국주의’라고 전망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전 세계가 중국의 대국주의나 패권주의에 예민해 있는 시점에서, 모택동의 말을 근거로 하여 진징이 교수가 “50년 전의 마오의 이 말은 오늘의 중국을 정확히 읽는 키워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은연중에 모택동의 예언성과 예측능력을 드러내주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모택동과 전삼강의 대화가 있고, 10년이 못 되어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1964년 10월 16일, 인민일보는 호외를 뿌리며 핵실험 성공에 환호한다. 겉으로는 미국의 핵무기를 ‘종이호랑이’라고 비웃던 모택동이었지만, 속으로는 원자탄 개발만이 중국의 안보와 국제적 위상을 담보한다는 믿음으로 핵개발에 전력투구했던 결과였다. 대화가 있었던 1955년, 바로 이듬해인 1956년, 중국은 ‘核공업부’를 설치하고 1958년엔 전문가들로 구성된 원자폭탄 연구소를 가동한다. 얼마나 절박했던 과제였느냐 하면, 당시의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었던 진의가 “바지를 전당포에 잡혀서라도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초기인 1967년 6월 17일엔, 수소폭탄마저 개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72년, 세계의 의표를 찔렀던 中美정상회담은 이러한 중국의 강한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 추진될 수 있었다.

모택동을, 시대의 특출한 思索家요 書齋人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봄, 나는 연변에서 우연히 일본의  종합지 월간 ‘文藝春秋’ 2월호 증간본을 손에 넣게 되었다. 거기에, 일본의 저명한 중국 연구가인 다케우치 미노루(竹內實)가 아주 흥미 있는 글을 싣고 있었다. 40년 전인 1960년, 그는 중국 상해에서 모택동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의 인상을 기록한 글이었다. 몇 대목을 옮겨본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안의 별실로 옮겨 갈 때 뚫어지라 모택동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뒤따르고 있는 野間宏(노마 히로시) 씨보다 키가 컸고 어깨 폭도 넓었다. 그리고 튼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흔히 중국화에 나오는 맹호를 연상케 했다. 쭉 뻗은 두 어깨는 그런 그림 속의 호랑이를 속 빼닮은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뼈대가 굵은 편이라 중국 남방인 특유의 유연함을 볼 수 없었다. … 그의 음성은 매우 낮아서 바로 옆에 앉은 통역인 趙安博씨에게만 들릴 정도였다. … 한 마디 두 마디 씩 옆자리에 앉아있는 주은래에게 확인이나 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언일구를 놓치지 않으려고 조 씨의 일본어 통역을 메모했다. … 얼마 전에도 그 당시 메모한 것을 다시 읽어본 일이 있었는데 安保改定反對 데모가 한창이던 일본 정세에 대한 모택동의 견해가 있는 그대로 개진되어 있었다. 그렇기도 하나, 그중에 그가 자라난 과정과 사고방식의 변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 부분이 나에게는 전적으로 흥미를 느끼게 한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생각이었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가 장사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의 교장 대리를 하고 있을 무렵.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助) 씨가 장사 지방을 여행하면서 어떤 소학교를 방문했을 때, 무뚝뚝한 교장을 만났다는 것이다. 연대가 조금 불분명한 까닭으로 나는 그 교장이 모택동이 아니었다고 추정했었지만, 지금은 그 사람이 분명히 모택동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 그는 필사적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전연 무시하고 시선을 실내의 허공에 집중하고 계속 말하는 것이었다. 잠깐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듯 나를 본 적이 있다고 메모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혁명가 모택동이 아니고 서재인 모택동의 측면을 연구하려고 한 것은 그 당시의 나의 직감을 믿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서재인, 명상가, 動보다 靜의 사람이라는 것이 ‘내 인상의 요약’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복잡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허세 부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위의 인용문은, 모택동에 대한 한국인의 보편적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모택동에 대해서는 양극단의 생각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 문화대혁명까지도 미화하고 찬양하는 극단의 찬양파가 있는가 하면, 모택동은 여자나 밝히고, 정치수용소에 억울한 사람들을 가두고, 문화대혁명 때는 2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게 한, 몹쓸 지도자로 도장을 찍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 분들에게 일본인 竹內實의 모택동 이야기는 너무 엉뚱하고 생뚱맞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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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6-05-12 11:47:54
모택동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