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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심리학
애도 심리학
  • 박구용
  • 승인 2022.11.28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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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박구용 편집기획위원 / 전남대 철학과·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박구용 전남대 교수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발터 벤야민의 말로라면 우리 국민에겐 지금이 비상사태다. 일상이 비상인 국민의 수를 줄이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이 책무를 다하자면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관료들의 일상은 비상이어야 한다. 현실은 거꾸로다. 국민은 비상사태로 진입한 데 반해 대통령과 정부는 벌써 평온한 일상이다. 

정부가 정한 ‘애도 기간’은 이미 끝났다. 애도가 끝난 것일까, ‘애도 기간’이 끝난 것일까? 애도는 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의 슬픔은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일종의 노동이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나 혹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심리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작업이다. 

힘들어도 애도는 필수다.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한 행위다. 먼저 죽은 자는 애도의 과정에서 이 세계와의 인연을 끊고 다른 세계로 떠나야 한다. 살아남은 자 역시 죽은 자의 부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견디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리고 슬픈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산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입장에서도 죽음의 원인과 과정이 투명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왜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애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죽었는지 해명하지 못하는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죽음이다. 너무 억울해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되돌아온다.  

구천을 해매는 원혼들은 산 자들에게 끝없이 요구한다. 내가, 우리가 왜 죽었는지를 밝혀 달라! 산 자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해명하면 죽은 자들은 기억의 세상으로 떠날 수 있다. 반대로 이 요구가 무시되면 ‘죽은 자의 저주’가 시작된다. 죽은 자가 무슨 힘이 있어 저주를 할까? ‘죽은 자의 저주’는 애도, 그것도 제대로 된 애도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각성시키려는 우리 선조들의 애도 심리학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지우고 잃는 의식이 아니라 내 기억의 세계에 그/녀의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물론 나의 기억 속에 들어오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녀의 타자성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녀의 타자성은 아직 해명하지 못한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사실이자 진실이다. 그/녀의 타자성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기억에 앞서 책임을 요구한다. 기억의 세계로 떠나지 못하고 타자성을 고집하는 그/녀야 말로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이야말로 어쩌면 사실과 진실의 유일한 목격자다. 그러니 그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밝힐 발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밀할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뭇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소리는 사그라지고 있지만 그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서야 한다. 몸은 점점 사라지지만 사진 속 그들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이 마주치며 눈길을 교환할 때 그들의 죽음에 우리 자신을 포함시킬 정도의 책임감이 생겨날 수 있다. 책임을 없애기 위해서 이름과 얼굴까지 지운 것일까?

‘애도 기간’에 애도는 없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국민은 싸늘한 체념과 냉담에 휩싸인다. 실패한 애도는 국민들 몸 안에 각자의 방식으로 지하묘지를 만들게 마련이다. 지하묘지의 문을 열고 그/녀가 언제 되돌아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때까지 애도에 실패한 우리는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 그날이 진정한 애도의 시작이다.    

박구용 편집기획위원
전남대 철학과·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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