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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 새로운 상상력으로 ‘느린 폭력’에 맞서다
작가·활동가, 새로운 상상력으로 ‘느린 폭력’에 맞서다
  • 김재호
  • 승인 2022.11.20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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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롭 닉슨 지음 |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580쪽

미국 등 초강대국과 초국적 기업은 부유하고 평화로운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차원에서 다채로운 폭력을 은밀하게 저질러왔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극적인 일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지역적,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느린 폭력을 어떻게 가시적 현상으로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인가? 더구나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들이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과하게 가치 부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대에 말이다.

뉴미디어가 만병통치약이 되어주지는 않겠지만, 독창적 경계심을 품고 이용한다면 환경 정의를 진척시키기 위한 폭넓은 연합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연합은 반드시 전략적 에너지에 기대야 하고, 노동자 집단, 원주민 집단, 학생 집단, 진보적 과학자, 인권·여성권이나 시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 제지받지 않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조직적 운동가 등 좀더 전통적인 활동가들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 연합 내에서 다재다능한 존재인 작가-활동가는 불공정이나 자원 반란과 관련해 수면 아래 잠긴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정서적 힘을 부여함으로써 계속 결정적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비록 기술적 풍경은 급속도로 변하겠지만, 어떤 것들은 종전보다 더욱 끈질기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25년 전 나딘 고디머가 한 말 속에 담긴 다음과 같은 신념, 즉 “사회 변혁을 믿는 작가들은 늘 그들의 사회가 요구하기는커녕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을 찾아내고 있다”는 신념이 그 예다.

 

느린 폭력은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빈자를 양산한다

나는 저임금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독성 쓰레기 더미 폐기 행위에 깔린 경제 논리가 나무랄 데 없다고 생각하며, 그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오염도가 낮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그 나라 대기의 질은 로스앤젤레스와 비교할 때 비효율적일 만큼 나쁘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세계은행이 공해 산업을 최빈국으로 더 많이 이전하도록 장려하면 어떻겠는가?

-로런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세계은행의 기밀 메모(1991년 12월 12일)

서머스의 이 글을 먼저 인용한 이유는 아프리카 나라들이 3중으로 무시를 당했다는 이 책 저자의 언급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정치적 행위체로서, 둘째 내가 이 책에서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 부른 것의 장기적 피해자로서, 셋째 저만의 환경적 관례와 관심사를 지닌 문화권으로서 말이다. 내가 서머스의 경악할 만한 제안으로 책머리를 여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느린 폭력이 빈자의 환경주의에 영향을 끼치면서 제기하는 전략적·표현적 과제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 금융 자본에 의한 느린 폭력이 시민들이 억압받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이 책의 골자를 이루는 세 가지 관심사

첫 번째는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명명한 이른바 ‘느린 폭력’에 대해 정치적·창의적·이론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믿음이다. 느린 폭력이라는 표현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폭력,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이다. 폭력은 관례상 시간적으로는 즉각적이고 공간적으로는 폭발적이거나 극적인, 즉 바로 눈앞에서 충격적으로 펼쳐지는 사건이나 행동을 지칭한다. 저자는 우리가 그와는 다른 유의 폭력, 즉 극적이지도 즉각적이지도 않지만 점점 더 불어나고 축적되며, 그 영향력이 넓은 시간 규모에 걸쳐 퍼져가는 폭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느린 폭력의 비가시성에서 비롯되는 표현적·서사적·전략적 과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기후 변화, 녹아내리는 지구 빙권(氷圈), 독성 물질의 이동, 생물 증폭(biomagnification), 삼림 파괴, 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물질 피해, 해양 산성화, 서서히 펼쳐지는 숱한 환경 재앙은 단호하게 결집하고 행동하기 위한 노력을 가로막는 엄청난 표현상의 애로를 겪는다. 전쟁으로 인한 독성 물질의 피해, 혹은 기후 변화에 따른 결과인 장기간에 걸친 인간 및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경악할 정도로 도외시된 피해자들은 인간의 기억에 살아 있지도 전략적 계획에 제대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두 번째 관심사는 빈자의 환경주의다. 느린 폭력의 주된 피해자는 자원이 결핍된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의 가난은 삶의 수많은 영역에 파고드는 느린 폭력의 비가시성으로 인해 더욱 악화한다. 눈에 보이는 폭력에 치우친 우리 시대 미디어의 경향성은 터보자본주의(turbo-capitalism: 사회 평형을 유지하고 사회 불안을 잠재우는 조치가 부족한 자본주의)에 의해 일회용으로 치부되는 생태계의 취약성을 가중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케빈 베일스가 또 다른 책에서 “일회용 인간”이라 일컬은 이들의 취약성을 한층 악화한다. 우리는 그간 생태계와 인간 둘 다를 일회용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는 빈자의 환경주의가 (전적으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를 중심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아왔다. 그에 따라 부상하는 핵심 이슈는 전략이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는 자원을 향한 공격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에 대한 저항을 심화하기도 했다. 그 저항이 고립무원의 특정 장소에 국한한 투쟁이든, 지역을 넘어선 연대 구축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라는 경계를 초월한 행동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든 말이다.

세 번째 관심사는 환경과 관련한 작가-활동가들의 역할로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를 이어주는 가시성을 확보하는 데 유용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민한 상상력과 세상을 향한 열정에 힘입어 언론이 나 몰라라 하는 환경 불이익 계층의 대의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주목하는 주제는 석유 제국주의, 메가댐 산업, 독성 물질의 외주화, 신식민주의적 관광 산업, 반인간적인 보존 관행, 기업 및 환경의 탈규제, 상업의 군사화 같은 초국가적 현상, 즉 불균형하리만치 글로벌 사우스에 몰려 있는 빈자들의 생계와 전망과 기억 장치를 유독 위협하는 현상들이다. 알도 레오폴드는 “우리는 오직 스스로가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윤리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감각 영역에서 벗어난 인간·생명 공동체를 향해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느린 폭력을 가시화하고 기왕의 가시적인 것들이 누리는 특권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작가-활동가들이 활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들은 우리 감각으로는 인지하기 어려운 위험들(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든지 규모가 너무 미세하거나 방대하기 때문에, 또는 인간 관찰자의 관찰 기간 혹은 그의 생리적 생존 기간을 넘어서 발생하기 때문에)을 상상력을 발휘해 이해하게끔 이끈다. 그들의 내러티브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전과는 다른 유의 증언, 즉 보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증언을 제공한다.

 

이 책의 전개

이 세 가지 얼개를 토대로 본문의 각 장은 대표적인 작가-활동가와 그들이 주목한 느린 폭력의 사례를 제시한다. 1장 “느린 폭력, 신자유주의, 그리고 환경 피카레스크”는 1984년 12월 인도 보팔에서 일어난 유니언 카바이드 공장의 가스 유출 사건을 모티프로 하며, 인드라 신하의 소설 《애니멀스 피플》이 주요 텍스트다. 2장 “고속감기 화석: 석유 독재와 자원의 저주”는 압델라흐만 무니프의 5부작 소설 《소금 도시》를 통해 거대 석유 회사의 약탈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원의 저주에 시달리는 실상을 폭로한다. 3장 “파이프 드림: 켄 사로위와, 환경 정의, 그리고 극소수 민족의 권리”는 켄 사로위와가 주인공이다. 그는 석유 기업 셸과 셰브론의 석유 추출로 피해 입은 나이저강 삼각주의 극소수 민족을 대변하다가 나이지리아 정권에 의해 처형당한 작가-활동가다. 4장 “느린 폭력, 젠더, 그리고 빈자의 환경주의”에서는 토지 유실과 사막화에 맞서 그린벨트운동을 이끈 케냐의 작가-활동가 왕가리 마타이가 등장한다. 5장 “상상되지 않는 공동체: 메가댐, 근대성의 상징 기념물, 그리고 개발 난민”은 특히 제3세계의 메가댐 건설과 관련한 논의를 전개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책 《더 큰 공공선》을 통해 인도 나르마다강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건설과 관련한 개발 난민 이슈를 조명한다. 6장 “에코빌리지의 이방인: 인종, 관광 산업, 그리고 환경 시간”은 사냥감 보호 구역과 원주민 보호 구역으로 대표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엔클로저 생태학에 어린 강제 이주 트라우마를 다룬다. 저자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냥감 산장 방문기, 은자불로 은데벨레의 에세이 “사냥감 산장과 여가 식민주의자들”과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 “마을의 이방인”, 그리고 나딘 고디머의 단편소설 〈최고의 사파리〉가 주요 텍스트다. 7장 “후유증의 생태학: 정밀 타격전과 느린 폭력”은 걸프전과 이라크전 같은 현대전 발생 이후의 피해를 조명한다. 《순교자의 날: 작은 전쟁의 연대기》를 집필한 마이클 켈리의 관점과 육군 간호사 자격으로 걸프전을 직접 겪은 캐럴 피코의 삶을 대조함으로써 전쟁 후유증의 생태학을 다룬다. 8장 “환경주의, 탈식민주의, 그리고 미국학”은 오랫동안 반목해온 탈식민주의 연구와 환경 연구의 화해 과정을 소개하고, 미국학을 지방화하자고(즉 미국을 외부 시선으로 바라보고 미국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조정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흐름은 환경주의에도 영향을 끼쳐, 그 지적 흐름을 황야 윤리 같은 국내 문제에 주력하는 미국예외주의적 경향에서 좀더 다양한 환경적 접근법(즉 세계 차원에서 환경주의 운동의 기저를 이루는 추동력과 좀더 양립 가능한 접근법)으로 바꿔놓고 있다.

 

작가의 역할과 저항의 미래

이 책에서 보듯 미국 등 초강대국과 초국적 기업은 부유하고 평화로운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차원에서 다채로운 폭력을 은밀하게 저질러왔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극적인 일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지역적,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느린 폭력을 어떻게 가시적 현상으로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인가? 더구나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들이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과하게 가치 부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대에 말이다.

그래서 전략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초국가적으로 좀더 강력한 연대를 추구함에 있어, 어떻게 하면 활동가의 지구력과 뉴미디어의 순발력을 접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책 끝머리에서 저자는 장폴 사르트르의 ‘문학적 전념’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루면서 그가 작가를 “모종의 이차적 실천, 즉 이른바 폭로를 통한 실천을 선택한 존재”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하지만 이제 사르트르의 확신과는 달리 폭로 테크놀로지의 혁신은 이러한 이차적 실천의 의미를 몰라보게 바꿔놓았다. 따라서 “작가”는 점점 더 평범한 호칭이 되어버렸다. 이제 참여적 글쓰기는 두 번 다시 사르트르식의 전문가적 소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작가-해커 활동가〔hacktivist: 해커(hacker)와 활동가(activist)를 묶어 만든 신조어로, 컴퓨터 시스템에 침입해 정치·사회운동과 관련한 안건을 추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일부 작가-활동가는 빨리 한몫 잡으려는 작업자이지만, 또 어떤 작가-활동가는 긴 안목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만약 자신들이 애쓰지 않으면 기술적·신경생물학적·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세력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났을지도 모를 이슈들에 주목을 끄는 긴급성을 부여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연결성이 커지고 주의 분산도 심화하는 우리 시대가 환경 파괴에 관한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더욱 악화할 것인지 아니면 누그러뜨릴 것인지, 이는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정치 활동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정보 공유 공간(information commons: 온라인 커뮤니티나 공공 도서관 등 정보를 다루는 체제)을 방어하고자 하는 방대한 반란적 에너지가 바다·대기·영토 형태의 환경 공유 공간(environmental commons)을 그와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방어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뉴미디어가 만병통치약이 되어주지는 않겠지만, 독창적 경계심을 품고 이용한다면 환경 정의를 진척시키기 위한 폭넓은 연합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연합은 반드시 전략적 에너지에 기대야 하고, 노동자 집단, 원주민 집단, 학생 집단, 진보적 과학자, 인권·여성권이나 시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 제지받지 않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조직적 운동가 등 좀더 전통적인 활동가들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 연합 내에서 다재다능한 존재인 작가-활동가는 불공정이나 자원 반란과 관련해 수면 아래 잠긴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정서적 힘을 부여함으로써 계속 결정적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비록 기술적 풍경은 급속도로 변하겠지만, 어떤 것들은 종전보다 더욱 끈질기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25년 전 나딘 고디머가 한 말 속에 담긴 다음과 같은 신념, 즉 “사회 변혁을 믿는 작가들은 늘 그들의 사회가 요구하기는커녕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을 찾아내고 있다”는 신념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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