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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자본의 윤리, 자본의 기억
문화비평_자본의 윤리, 자본의 기억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6.05.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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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이 동아대 교수, 서양사 ©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구속됐다. 재벌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구속되고, 처벌받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연례행사처럼 돼버렸다.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한달 전, 검찰의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피했다가 1주일 만에 돌아와 발표한 정몽구 회장의 대국민사과문이 단서를 제공해준다. 현대차는 앞으로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정 회장의 발표문은 수사학적으로 흥미롭다. 범법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법이 아니라 윤리에 호소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윤리로써 법을 피해보려는 얄팍한 말장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때 정 회장은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말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재벌이 자행하는 범법의 기저에는 그들의 윤리적 둔감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기업, 다시 말해 자본에 윤리가 있을 수 있는가. 자본의 축적이 곧 인간의 소외라는 등식은, 구태여 마르크스주의에 기대지 않아도 일상에서 늘 목격하고 체험하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에도 윤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자본의 사적인 이익추구가 그 자체로 공동선과 공익에 기여한다는 공리주의 도덕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윤리란 여러 면에서 문제다. 철학적으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보편적 기준으로 통약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인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익 혹은 공동선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순간 사실 특수이익을 말하고 있는 사람이다. 공리주의 철학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도 문제다. 한나 아렌트는 공리주의적으로 용납되는 사적인 이익이란 궁극적으로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이익으로 한정되게 마련이고, 따라서 공익에 기여하지 못하는 인간은 잉여인간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으며, 전체주의 체제는 바로 그러한 공리주의적 사회에서 발현한 것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전체주의란 잉여인간들이 군집해 자신들의 기준으로 새로운 잉여인간을 만들어 박해와 학살을 자행한 체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홀로코스트와 굴락 수용소의 이면은 공리주의 철학이다.

공리주의를 벗어나 윤리를 논할 수 있는 철학적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통로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윤리학 논의가 취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보편적 기준이 없어진 시대에 제노사이드라는 과거의 부정적 체험이야말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자 검증판이 됐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박물관이 갈수록 많아지고, 홀로코스트를 전지구적 기억정치의 중핵으로 삼는 현상이 거듭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독일에서는 기업들까지 그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은 나치 범죄와 관련해 2003년까지 총 6백14억 6백만 유로(약 80조원)를 보상한 바 있는데, 2000년에는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설립해 나치시대에 독일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한 외국인들에게 개별적인 보상을 하기 시작했다. 재단이 구비한 총 1백1억 마르크 중 독일기업들이 총 51억 마르크를 제공했고, 재단의 이사진에는 벤츠와 도이체방크와 지멘스가 참여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대기업과 나치시대의 독일기업이 서로 비교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 들어 “윤리경영”을 목 놓아 외치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이 자신의 역사에 대해 그토록 침묵과 은폐로 일관하고 있는 현실에 놀란다. 올해 실시한 전경련의 조사로는 무려 84.1%의 기업들이 ‘윤리헌장’을 도입했다. 그러나 현재 사내에 기록보관소(archives)를 설치한 기업은 포항제철 단 한 곳뿐이다. 독일의 경우 크룹제철이 이미 1905년에 기록보관소를 설치했고, 그로부터 2년 후 바이엘과 지멘스가 뒤를 이었다. 자신의 과거기록을 관리해 공중에 제공하지도 않는 기업이 어떻게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윤리란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을 현재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게다가 기업들이 기록을 공개하면 한국 기업사가 부정적으로 서술되리라는 생각조차 기우다. 이 땅은 기업들에게 찬가를 불러줄 사람들로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그 찬가조차 기업들에게 가야할 길을 알려줄 것이다. 부정 속의 긍정이야말로 윤리일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듯 자본의 기억은 자본의 윤리를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김학이 / 동아대·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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