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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_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524쪽| 2005
서평 _ 『트랜스크리틱』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한길사| 524쪽| 2005
  • 문성원/부산대·기술철학
  • 승인 2006.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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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돈이다

                                                           
 대학과 학문 영역 깊숙이까지 돈이 파고들어와 있는 현실이다. 인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돈과 무관해 보이는 학문은 바야흐로 도태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돈’을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도 여전히, 아니 점점 더 강력하게 현실을 옭죄어 오는 이 물신(物神) 자체를 궁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을 이런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읽었다. 물론 돈의 물신성에 대한 탐구는 오래된 주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이번 ‘탐구’에는(이 책 ‘트랜스크리틱’은 이전에 출판된 가라타니의 ‘탐구Ⅰ’, ‘탐구Ⅱ’에 이은 ‘탐구Ⅲ’에 해당한다) 전과 다른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신자유주의가 발호(跋扈)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는 돈의 물신성이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것으로, 마치 종교와 같은 현상으로 간주된다. 비록 가상이라 해도 그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가상, 이른바 초월론적(transcendental) 가상이라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 물신성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다시 바라본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가 종교적인 특성마저 지니는 것으로 나타난다.

 

거꾸로 보면 종교도 ‘돈’적인, ‘돈’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가 볼 때 종교 역시 일종의 교환에,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교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종교만이 아니라 국가와 ‘네이션’도 교환으로 해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교환 체계로, 네이션은 공동체 내의 호혜적 교환 체계로 보고자 한다(이런 점에서 저자나 역자는 ‘네이션’을 ‘민족’으로 옮기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자본은 ‘교환에 의해’ 잉여가치가 얻어질 때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이 자본, 네이션, 국가가 일체를 이루어 서로를 지탱해 준다. 그래서 이 가운데 하나만을 제거하고자 하면, 예컨대 자본만을 제거하고자 하면 그 나머지 요소들의 과잉에 봉착하게 된다. 국가의 과잉은 스탈린주의요, 네이션의 과잉은 파시즘이다. 아무튼 이 자본-네이션-국가의 결합체를 관통하는 것은 교환이고, 가라타니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교환을 중심으로 한 세상읽기를 보여준다.

 ‘트랜스크리틱’의 ‘트랜스’도 이 교환과 무관하지 않다. 가라타니는 트랜스의 의미를 ‘이동’으로, 횡단(transverse)과 전위(transposition)로 제시한다. 위치의 교환, 입장의 교환이 곧 트랜스인 셈이다. 그런데 이 이동과 교환은 대칭적이고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환은 타자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의 교환은 그 결과가 미리 보장되어 있지 않다. 상품은 팔리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불확실한 타자성과의 대면, 이것이 교환의 특성이다. 또 이것은 비판과 비평, 곧 ‘크리틱’의 특성이기도 하다. 타자성을 향한 끊임없는 이동, 그 위험의 감내 가운데 비판이 존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은 어떤 예정된 도달점을 갖지 않는다. 마치 돈이 어떤 고정된 교환 대상을 갖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의 범(凡)교환주의는 돈이라는 물신의 초월론적 위치를 전제하며 또 요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이 이처럼 물신이 횡행하는 현실의 반영이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처사일 것이다. 그는 분명 나름의 대안을 내놓고 있고, 그것이 가라타니 자신이 이 책을 스스로의 특별한 저작이라고 이야기하는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 대안은 물론 교환 및 돈과 관계된다. 가라타니는 자본, 네이션, 국가에 이어 제4의 교환 유형을 내세우는데, 그것이 ‘어소시에이션’이다. 어소시에이션이란 개인들이 형성하는 자발적인 교환조직을 일컫는다. 그것은 우선 국지적이지만 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일종의 지역화폐인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LETS는 돈이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으면서 돈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형태이다. 적어도 가라타니는 스스로 제기한 문제의 차원에서 맹아적이나마 그 실천적 해결책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그는 일본에서 NAM이라는 ‘새로운 어소시에셔니스트 운동’을 주도해 오고 있다).

 ‘트랜스크리틱’의 부제는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이다. 실제로 500쪽에 이르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칸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에 바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들은 꽤나 모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의도의 일관성은 돋보이지만, 그에 따른 반복적 변주가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라타니 주장의 대강을 알고 싶은 사람은 서론과 결론 부분만 읽어도 괜찮을 듯싶다.

 

문성원/부산대·기술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L. Althusser의 마르크스주의 철학--그의 헤겔 비판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저로는 ‘철학의 시추’, ‘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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