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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열풍은 왜, 어떻게 사라졌나
하버마스 열풍은 왜, 어떻게 사라졌나
  • 김재호
  • 승인 2022.11.11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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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하버마스 스캔들』 이시윤 지음 | 파이돈 | 532쪽

1996년 4월 27일, 철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학문적 논쟁의 구심점이었던 하버마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언론의 취재 열기는 하버마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2주간의 빡빡한 일정과 구름같이 몰려든 청중과의 만남은 그를 당혹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학계의 하버마스 열풍은 바로 그 순간부터, 하버마스가 한국을 떠나자마자 식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의 망이 결집된, 한때 정점에 이르렀던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깊이 있는 연구와 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국내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진=위키피디아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강타했던 하버마스 열풍을 이끈 학자들, 즉 90년대 하버마스 네트워크를 이끈 주역들은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계명대 철학과의 이진우, 한림대 철학과의 장춘익이었다. 이들은 하버마스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수입하고 유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하버마스의 인기를 견인한 세 집단은 제도권에 속한 주류 이론가 교수 그룹, 학술운동 영역에서 성장한 변혁주의 그룹, 그리고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버마스를 통해 학술적 성취와 정치적 변혁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새로운 지대를 창출하려 한 신진 하버마스 연구자 그룹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 그룹들이 견인한 “하버마스의 인기는 국내 학술영역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조차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수많은 전공자들과 전문연구자들이 하버마스를 스스로 완전히 버렸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스캔들”이다.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뭉친 철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출간한 수많은 책과 논문은 하버마스 네트워크가 양적인 지표상 일정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신드롬으로 그쳤다. 

 

하버마스의 국내 수용과 관련해 기존의 학술적 접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한국 철학사 혹은 서양 철학 수용사에 대한 사상사적 접근에서 하버마스의 수용이 자주 언급되었다.

공통으로 지적되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은 80년대에 마르크스가 금지된 상황에서 ‘우회로’로서 도입됐다는 점, 그리고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에 처하면서 그 대안으로 하버마스가 재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은 하버마스 수용의 중요한 측면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지식사회학적 관점 없이 단순한 사상사적 흐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수용자들은 정확히 누구였으며 그들은 왜 하버마스를 수용하고자 했는가? 대안으로 가능한 많은 이론들 중에서 왜 하버마스가 가장 주목받았는가? 90년대 중반 하버마스 열기는 어떻게 가능했으며, 왜 급격히 냉각되었는가?  

책의 저자인 소장학자 이시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활용해 하버마스 열풍을 주도했던 학자들의 실명을 낱낱이 밝히고 그들의 학문적 궤적을 하나하나 세세히 추적한다. 그리고 학계 저변에 깔려 있는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를 끄집어낸다.

‘딜레탕티즘’은 학술장의 주류 엘리트들이 ‘좁고 깊은’ 학술적 탐구를 수행하기보다 ‘얕고 넓은’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손쉽게 취득한 상징권력으로 장 내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재생산하는 데 안주하려는 성향이다. 반면에 ‘학술적 도구주의’는 학술지식 생산의 목적을 학술 외적인 것의 실현에 봉사하는 것에 두면서 장 외부로부터 인정을 얻으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축으로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가 왜 유행하는 이론과 외국 학자들에는 민감하고 깊이 있는 연구는 부족한지, 지금의 학계가 갖고 있는 문제와 한계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된다.

하버마스와 부르디외의 이론에 대한 간결하고 명료한 설명을 비롯해 하버마스 수용과 실패의 과정을 지식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규명해나가는 저자의 글은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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