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0:30 (금)
4·16과 10·29 참사, 뭐가 다른가?
4·16과 10·29 참사, 뭐가 다른가?
  • 신희선
  • 승인 2022.11.14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해가 저물어도 내일 다시 해가 뜨듯이/ 내일 다시 당신을 만나리라 굳게 믿었던/ 내일은 사라지고/ 당신의 장례식장을 찾아가 꽃을 바친다.” 정호승 시인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시다. 이태원 참사 소식에 황망한 마음으로, 꽃 같은 청춘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애도한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온 20대 젊은이들이 이태원 거리에서 압사 당했다. 많은 이들이 제주 수학여행 길에 참변을 당한 세월호의 어린 학생들을 떠올렸다. 무능한 정부의 무방비 대책으로 귀한 생명들이 어이없이 스러졌다. 시민의 일상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8년이 지난 2022년 10.29 참사는 뭐가 다른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는 국민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가만히 있어라”는 안내 방송만 믿은 학생들을 버려두고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과, 허술한 위기 대응 시스템으로 구조 시간을 허비했던 정부의 무능함이 세월호를 최악의 인재(人災)로 만들었다. 이태원 참사도 지휘부의 부재와 안전관리 방기로 초래되었다.

핼러윈 축제에 많은 인파가 몰리는 혼잡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대형사고가 나기 일보직전”이라고 “경찰이 와서 통제해야 할 것 같다”는 신고가 수차례 접수되었지만 곧바로 대처하지 않았다. 시민의 생명 보호와 공공안전이 최우선임을 망각하였다. 

외신들은 “한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평시 재난”이라고 보도하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비극의 원인은 군중의 행동이 아니라 지자체와 경찰의 태만한 대응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국이 사전에 위험을 완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면 이태원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정부의 기본 역할임에도 이태원에서 다수의 참담한 죽음은 한국의 명백한 실패라는 것이다. 예상되는 위험에 미흡한 대책과 책임회피로,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퇴진에 대한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세월호에 이어 이태원에도 국가는 없었다. ‘정권교체’만을 내세우며 당선된 집권 세력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다. 행사의 주최가 누구든 사건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관리는 정부의 기본 역할이다.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이전하면서 대통령 호위로 경찰력이 허비되면서 핼러윈 주말을 앞 둔 이태원에 시민안전을 위해 투입될 기동 인력이 없었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1조 5천억 원을 들여 구축한 재난안전통신망도 작동되지 않았다. 결국 10.29 참사는 ‘관재(官災)’였다. 어이없는 사실은 참사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자 시민단체 동향을 분석한 문건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권안보에 주력해도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날마다 합동분향소로 출근하듯 조문을 하고, 종교계 추모행사에 참석해도 여론은 싸늘하다. 법을 잣대로 상대 진영을 겁박하고 여론을 단속하고 있는 검찰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다시 촛불이 켜지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집단도 여전히 광장 한 켠을 맴돌고 있다. 국민 통합은 수사에 그치고 극단의 대립만 존재하는 분열된 사회를 살고 있다. 퇴행과 분열의 정치로 한국 사회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진실 없는 진실에게 조종을 울린다/ 양심 없는 양심에게 조종을 울린다/ 당신의 공정하지 않은 공정에게도/ 평등하지 않은 평등에게도/ 정의롭지 못한 정의에게도 조종을 울린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가 아니라 ‘사고 사망자’로 표현하며 정부의 책임을 사실상 회피했다. ‘별 일 있겠어’라는 안일한 대응과 무책임이 또 다시 참사를 낳았다.

10.29 참사로 세월호를 소환하게 된 슬픈 가을이다. 에둘러 표현할 길이 없다. 정의롭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정부다.『슬픔이 택배로 왔다』시집에 실린 「조종을 울리며」의 글귀가 사무치게 와 닿는 시간이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