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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어선 안전 불감증
도를 넘어선 안전 불감증
  • 이덕환
  • 승인 2022.11.1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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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이덕환 논설위원 /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이덕환 논설위원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작 40미터 길이의 평범한 골목길에서 15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197명이 몸을 다쳤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시설물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폭 3.2미터의 좁은 골목길의 양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뿐이었다. 할로윈을 맞이해서 모처럼 마스크를 벗어던진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이태원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사실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결국 이태원 참사는 우리 사회의 도를 넘어선 안전 불감증이 만들어낸 참혹하고,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사고였다.

압사(壓死)는 지나치게 놀라거나 흥분한 군중이 좁은 공간으로 한꺼번에 밀려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타까운 사고다. 1제곱미터의 면적에 6명 이상이 몰려들면 사람들이 심한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칫 누구라도 균형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지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멀쩡하게 서있는 상태에서도 호흡이 어려워져 질식할 수도 있다.

이태원의 골목에서는 1제곱미터의 공간에 무려 16명의 인파가 몰려있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가슴이 앞뒤 12.5센티미터의 폭으로 짓눌렸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호흡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가슴의 골절에 의한 심장·혈관 파열로 가슴·배에 심한 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과밀(過密) 상태에 갇혀버리면 개인의 노력만으로 위험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태원 참사는 정부의 인파 관리 실패에 의한 인재(人災)였다. ‘주최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인파 관리가 불가능했다는 주장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엉터리 궤변이다. 오히려 경찰관은 주최기관의 유무에 상관없이 ‘극도의 혼잡’으로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5조에 명시되어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태원 현장의 경찰이 그런 책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 물론 책임자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지자체의 책임도 절대 가볍지 않다. ‘마음의 책임’과 같은 말장난은 부끄러운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생생한 기억도 모자라 또 다시 참혹한 기억을 떠안게 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황망하게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의 아픔도 헤아려줘야 한다. 허울뿐인 ‘무한책임’을 외치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광분(狂奔)하는 정치권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희생자의 명단과 사진을 공개하라는 정치권의 요구는 후안무치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을 바로잡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밀에 무신경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현실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지하철·승강장·공연장·축제에서의 적극적인 인파 관리를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물론 필요한 비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사회적 목소리를 표출하기 위한 대규모 군중집회를 대체할 현실적인 대안도 찾아내야만 한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안전사고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무고한 젊은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안전사고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덕환 논설위원
서강대 명예교수 /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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