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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는 지성에 대한 위협이다"
"근본주의는 지성에 대한 위협이다"
  • 윤평중 한신대
  • 승인 2006.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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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제395호)에 다시 답한다

존경하는 정대현 교수의 논저에 대한 나의 서평(교수신문 제 392호)과 재반론(제394호)에 대해 정교수가 반론(제393호)과 재반론(제395호)으로 응답하였다. 논쟁의 궤적에서 그가 보여주는 지적 성실성과 치열함은 나와 같은 후학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된다.

정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다원주의 시대의 대안적 가치 모색에 있어 자유와 평등 같은 ‘수단적 가치’들을 ‘절충주의적’으로 ‘병렬’하는 것은 합리성을 방기하는 것이다. 정 교수에 의하면, ‘자유나 평등은 인간론의 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자유는 개인에 한정되는 국지적 경험이고, 평등도 인간관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연대성을 향한 부정성 경험 극복의 소수자 관점을 가장 일관되게 유지해 온 인간론인 여성주의”와, 그것의 철학적 명제화인 “성기성물이 최소 인간론의 충분조건”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성기성물 명제의 ‘공지칭성’ 또는 ‘공유가치성’은 ‘구조적으로 다원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에 다원주의를 논거로 성기성물 테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나의 비판은 심각한 오독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내 논변에서 드러나는 ‘절충주의가 합리성을 문맥적 호소’로 축소시킴으로써 엄정한 합리성의 토대위에 구축되어야 할 ‘지성’의 임무를 ‘포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논의의 엄격함이 주요 덕목일 수밖에 없는 학문 세계에서 절충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중립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와 평등의 위상을 논함에 있어 정 교수가 먼저 사용한 절충주의라는 부정적 용어 대신 ‘열려진 체계에의 시도’라는 표현을 제안 한 바 있다. 내가 실천적 해석학이라 부른 열린 체계는 자유와 평등뿐만 아니라 정의, 진리, 사랑, 덕, 놀이, 의미 등을 삶의 기본 가치로 수용하는 체계다. 그렇다면 작금의 양극화 논쟁에서와 같이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대립할 때, 정 교수의 지적처럼 내가 이 대립구도를 ‘한국 일상언어라는 원초적 체계’가 획정한 ‘문맥적 호소’로 환원시키고 있는가? 그리하여 내가 ‘자유, 평등, 성기성물 같은 지성적 구성물들의 절충적 조정을 일상언어라는 원초적 체계에 맡김으로써 지성을 포기’하고 있는가?

먼저 자유와 평등 같은 기본 가치들의 긴장이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해소될 수 있다고 나는 이번 논쟁에서나 다른 논저에서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오히려 일상언어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권력관계와 물질적 투쟁이 반영되고 서로 삼투하는 역동적 지평이라고 본다. 내가 주장한 ‘담론이론의 사회철학’은, 언어로의 환원을 끈질기게 거부하는 언어외적인 이런 질료적 요소들에 주목하며 부단히 언어의 태생적 한계를 일깨운다. 이처럼 나의 언어관은 정 교수가 나한테 귀속시키는 일상언어 만능주의와 오히려 대극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지 않은 사항을 설정해서 비판한다는 점에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한 정 교수의 논변은 그 자체가 언어환원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나는 정 교수와 함께 ‘대부분의 이해 갈등의 조정’이 일상언어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동감하지만, 그 일상언어가 그가 암시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언어적 문맥 안으로 삼켜버리는 자기충족적 체계라고 생각지 않는다.

일상언어 안에 내장된 반성과 성찰의 계기는 정 교수 언어관의 일면성을 고발한다. 언어적 맥락 안에는 권력관계의 소용돌이를 평가하는 검증의 기제가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검증기제가 부재한 일상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상언어가 원초적 체계’이며 그것에의 함몰이 일차원적이므로 반지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 교수의 일상언어관은 언어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결여함으로써, 한편으로 언어환원주의를 차용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기능을 왜소화시키는 형용모순을 범하는 듯 보인다. 실천적 해석학은 세계에 대한 언어의 규정력에 주목하지만 동시에 언어도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언어환원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성기성물 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의 실천적 해석학은 ‘기본 가치들의 우선성과 타당성이 해석학적 의미에서 변화가능성과 민주주의적 검증가능성 앞에 항상적으로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양극화 담론의 부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자유와 평등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엄존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두 가치가 정 교수의 우려처럼 ‘모순같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와 평등이 근대적 인륜성의 기초로서 선언된 뒤, 민주적인 삶의 세계와 공론장에서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실험되고 수정되어왔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아가 두 가치사이의 우선성과 타당성은 생활세계의 현장에서 계속 검증됨으로써 공적 합리성의 규준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되고 조정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기성물 명제 자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해 보자. 원래 중용의 성기성물은 자연의 도덕적 성격을 전제함으로써 성립하였다. 그렇다면 과도한 존재론적 부담을 동반하는 자연의 본원적 도덕성 테제를 수용할 수 없는 현대에 어떻게 성기성물을 보편화할 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성기성물이 최소인간론이 아니라 최대인간론에 더 가까운 이유인 것이다. 성기와 성물 사이의 간극은 이처럼 넓고도 깊다.

나아가 成己의 차원에서 소수자와 약자의 관점은 자동적으로 옳은가? 설령 여성주의가 소수자나 약자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타당한가? 여성주의도 자유나 평등, 정의나 진리라는 다른 기본 가치들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제시한 복수의 기본 가치들도 공지칭성이나 공유가치성을 수반하므로 성기성물이 공지칭성을 독점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리하게 보편화된 성기성물의 근본 가치가 다원주의 시대의 지성을 위협할 가능성은 정녕 없는가?

윤평중/한신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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