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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不在의 사치, 不在의 공동체
문화비평: 不在의 사치, 不在의 공동체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6.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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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Jordances 作 'The King drinks', 1638. ©

잘 알려진 대로 베블렌, 마르셀 모스, 좀바르트, 바타이유, 엘리아스, 그리고 보드리야르 등의 노작은 사치를 인간현상의 種的 특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들은 사치와 낭비를 향한 인간적 열정과 그 코드화된 제도관습을 면밀히 분석해서 인간의 생활을 견인하는 근원적 관심의 한 층을 드러낸다. 틸리히(P. Tillich)의 지론처럼 근원적 관심이 무릇 종교적이라면, 사치와 낭비의 열정 역시 가히 종교적일 정도인데, 흥미롭게도 종교와 (극히 종교적인!) 에로티즘이야말로 사치와 낭비의 精華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 사치학의 대가들이 놓친 개념을 나는 '不在의 사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不在-奢侈라는 이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o)의 어법 속에 쇠락하는 인문적 가치의 역설적 갱생을 꿈꾼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그간 역사적으로 내내 불화해왔던 종교적 세계와 인문학적 가치가 가장 서늘하고 낮게 共榮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부재의 사치가 모이는 지점과 그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종교와 인문학이 새로운 교환의 관계를 통해  자본과 기술의 전일적 物化를 현명하게 견제하고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이유)로 걸어나가는 길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 빛은 빛나지 않고(眞光不輝) 큰 형상은 꼴이 없다(大像無形)는 경지를 얻기 위해 노자까지 호출할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상징적 잉여가치를 따지기 위해 本來無一物하는 불교를 들먹일 것도 없다. 일상은 늘 '틈'으로 부스럭거리는 법이고, 자본주의 속의 '공허'는 의외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缺落이 아닌 不在인데, 그 모든 결락을 빠르고 실수없이 채울 뿐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결락(욕망)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이 곧 사치가 부재 속에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부재의 사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의 하나는 禪家의 空慧, 보다 가깝게는 무소유의 풍경과 같은 것이다. 법정의 베스트셀러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한 '무소유'는 수도자의 생활이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그 알속이 있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유포시킨 사례다; 아울러 그 비움은 다만 결핍이 아니라 기묘하게 팽창하는 부재의 울림(사치)이라는 사실을 報施하듯 전파한다. 바타이유의 말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소비의 행위 속에는 모종의 영성적 권위가 움트고, 모스의 고전적 분석이 시사하듯 증여의 행위가 순수해지면서 신적 후광을 입는 법이다. 요컨대 부재의 사치란 상품의 교환이 끊어진 자리에서 오히려 도도하게 피어오르는 人紋의 울림과 떨림인 것이다.

그것은 物神을 죽인 자리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人紋의 샘과 같은 것이다. 피카드(Max Picard)는 침묵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서 '꽉찬 침묵'을 얘기하는데, 부재의 사치란 비움의 지난한 노동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꽉찬 상징적 권위의 아우라와 닮았다. 예를 들어 욕심은 아우라를 생성시키지 못하지만 의욕은 다른데, 의욕은 결국 부재를 향한 실존적 投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수백억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재벌가의 공표에는 아무런 부재도, 아우라도, 권위의 울림도 없다. 요컨대 그것은 '의욕없는 욕심'의 陰畵일 뿐! 비록 그것이 증여(선물)의 형식을 띠더라만 실은 자본제적 교환을 옹위하는 또 하나의 엄혹한 장치일 뿐이다. 자본에 대한 변명은 자본의 외부가 아니며, 그것 역시 또 다른 자본이기 때문이다.

내게 ‘없는’ 것 중에는 특히 주민등록증과 핸드폰이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이 부재를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쟁취'했달 수 있는데, 그런 뜻에서 그 부재의 안팎에는 상징적 사치의 기미가 돈다. 이것을 결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가질 수 있지만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포기가 내 삶의 양식에 얹힌 선택이며, 사회적 주류의 시선을 뿌리치고 이루어진 새로운 교환에 대한 실천적 재구성의 작은 징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뜻하는 '부재의 공동체'란 이 '부재의 사치'가 참으로 풍성한 교환을 이루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만 점점이 이루어질 것이다.

한일장신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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