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 창간되었는데, 첫 주간이 정지용, 편집국장은 작가 염상섭으로 둘 다 취임. 사임 날자가 같다. 자세히 말하면 광복 직후의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이 두 문학인은 정치적인 중립과 민족의식이 강한 양심세력으로 작품이나 각종 글에 이런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다. 둘 다 ‘세속적인 친일파’가 아닌데다 통일. 민주 국가 건설을 표방하며 반외세 의식이 강했다. 카톨릭 재단이었던 <<경향신문>>이 이 두 문학인을 요직에 발탁한 것은 신문이나 독자와 한국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1년만에 둘이 함께 물러나고 후임 주간으로 작가이자 영문학자인 조용만으로 대체된 것은 당시의 혼탁한 시국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분위기를 간파해낼 수 있다.
<<경향신문>> 창간사는 “인민은 어느 피리에 어느 정도(程度)로 춤을 추어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거니와 하물며 필진이 이에 추수(追隨)하여서 안 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면서 “다만 건국 전후 초몽 혼돈에 처하여 도의양심을 수완(手腕)에 옮기는 실천적 일개 행자로서의 신문인과 신문이 필요한 시기가 왔는가 할 뿐이다”는 구절에 스며있는 지식인의 참담한 고백이 당시 지식인들의 삶에 다름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시기에 정지용은 칼럼 <여적(餘滴)>을 비롯하여 기명으로도 여러 평문을 자신이 재직했던 <<경향신문>>에다 썼다. 그의 명 칼럼들은 거의 수습되어 단행본 <<산문>>(1949)에 실려 있는데, 그 간결명료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정치적인 선명성을 담아낸 문체는 오늘의 문인들이 본받아 마땅한 귀감이 될 법하다.
가장 인상적인 글은 여운형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지닌 칼럼이다. 그는 여운형을 “무모탈건(無帽脫巾)에 일개 표일(飄逸)한 지도자. 좋다!”고 상찬 하면서 “테러단 골목을 이웃집 다니듯 하는” 여운형에게 “당원 중에 실직충건(實直忠健)한 인사가 있으시거던 좀 신변보장에 유의하시오!”라는 충언을 예언처럼 했었다. 이 칼럼을 언제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분명한 사실은 지용이 이 신문사를 사직한 열흘 뒤인 7월 19일 여운형은 암살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 충고를 들었다면 여운형은 암살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이후 정지용의 사생활을 더 추적하는 것은 차라리 잔인한 가혹 행위일 것이다. 그는 1948년 이화여대도 사임하고(나는 그 사임이 자의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산문>에는 이를 뒷받침 할만한 내용이 충분히 나온다. ‘해직 교수’ 개념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녹번리 초당으로 이사, 소일했다고들 하지만 감시와 탄압 속에서 지냈다. 명칼럼은 이런 예언성을 담아내야 한다.
이 명칼럼 <여적>은 그 뒤 이승만 독재를 비판해서 <<경향신문>>을 폐간조치(1959.2.5)토록 만들기도 했고(시인 주요한 집필), 이어령의 명문(1962-1965년간 논설위원 재직)을 선보이기도 했던 역사적인 고정란이다.
▲임헌영 중앙대 교수, 문학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