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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한 회고조에 편향된 논리
안이한 회고조에 편향된 논리
  • 최강민 문학평론가
  • 승인 2006.05.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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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칼럼에 대한 비판적 성찰

  요새 문인들의 글을 신문지상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근대적 신문의 탄생 이래 한국 사회에서 당대 지식인이자 예술인이었던 문인들은 늘 신문 칼럼을 장식하는 주요 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전문적인 칼럼니스트들이 부재하거나 부족한 상황에서 세련된 문장력과 문학적 명성을 소유한 문인들은 칼럼 섭외의 매력적인 대상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과거에 칼럼을 기고하는 필자들은 주로 중견급 이상의 문인들이었는데, 최근 들어 젊은 문인들의 칼럼 쓰기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인들의 글은 칼럼이 지녀야 할 기본적 요소인 의제설정, 전문성, 문장력, 논지의 균형감각,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통찰력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 부분을 따지다 보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칼럼은 심층보도형, 의견 제시형, 가십형, 재담가형, 에세이형, 일기형, 충고형 칼럼 등으로 크게 나눈다. 한국의 문인들이 주로 쓰는 칼럼은 의견 제시형과 에세이형 칼럼이다. 칼럼에 있어 주의 사항은 칼럼이 공론의 장에서 행해지는 논리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인들은 이 기본적인 사항을 종종 망각한다. 물론 오늘날의 칼럼은 격식을 차리기보다 친근한 화법으로 다가가는 경향의 변화를 보인다. 그렇지만 여론을 형성하는 칼럼의 본질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여러 신문에 칼럼을 쓰는 소설가 정이현은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가볍게 칼럼을 쓴다. 그녀의 칼럼은 부담없이 신문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친구처럼 다가가 대화하듯 전개된다. 이것은 분명 장점일 것이다. 문제는 1인칭 주어인 ‘나’의 빈번한 등장과 주관이 많이 담긴 단어가 등장함으로써 작가 개인의 일상적 경험을 사회적 차원으로 객관화시키는 데에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지켜야 할 작가가 외래어나 비어를 분별없이 쓰는 것도 옥의 티이다. 예를 들어 <한겨레> 신문에 실린 그녀의 칼럼 중에서 “헛, 참 쪽팔리네” “일본 야구의 베이스는” “이제 지겹다” 등의 비어, 외래어, 주관적 감정의 언어는 독자에게 때로는 거부감을 유발한다.

젊은 소설가 김별아의 칼럼도 정이현처럼 사적 경험을 주로 이야기하다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약간 발언하는 식이다. 김별아도 특정 문제에 대한 현상이나 느낌을 대체적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쳐 심도 있는 천착이나 대안 제시에 취약하다. 사적 경험을 앞세운 정이현과 김별아의 가벼운 칼럼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일 수는 있어도 칼럼의 미래일 수는 없지 않을까.


  사적인 에세이와 공적인 칼럼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글쓰기는 소설가 이순원에게도 보인다. 이순원의 칼럼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예시한 다음 사회 세태와 관련한 언급을 짧게 하는 패턴을 보인다. 논리적인 견해보다 문학적인 묘사와 비유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순원 칼럼의 특징이다. 이러다 보니 이순원은 칼럼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건 칼럼이라면 좀더 심층적 내용이나 입장이 나와야 하는데, 이순원은 복고주의와 사적 경험을 적당히 버무려 이야기하는 데에 만족한다. 현재를 성찰하는 거울로 과거를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과하게 남용되거나 고착화될 때, 과거는 절대적 낭만화 속에 현재를 식물인간으로 무력화시킨다.


 

소설가 김주영의 칼럼은 주로 에피소드와 사회적 문제를 연결하는 식이다. 김주영은 이순원보다 사적 경험에 의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고 대사회적 발언이 조금 더 많다. 문제는 그 주장이 논리적 근거의 부적절 내지 미흡 속에 균형성을 종종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김주영은 ?군을 흔들지 말라?(<세계일보>)라는 칼럼에서 자신의 군대체험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로 현재의 젊은이에게 군대를 꼭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군에 가야만 생성된다는 식의 단선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기밀을 노출한 행위에 대한 저자의 개탄도 군사기밀의 기준과 국민들의 알권리에 대한 성찰과 분석이 생략된 채 현상만을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외에도 김주영은 비문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도 선망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세계인들을 속여먹은 거짓말쟁이였다는 것이 들통 나버린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황우석 박사가’라는 주어를 ‘없었던’과 ‘세계인들을’ 사이에 집어넣었어야 했다. 이러한 문장의 오류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논리적 균형의 상실은 시인 남진우의 칼럼에서도 때때로 보여진다. 특히 그것은 남진우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을 언급할 때에 그러하다. ?정겨운 남도 문학기행?(<동아일보>)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의 기념관을 찾은 소감을 말하면서, 남진우는 시인의 대표작과 함께 미당의 친일시와 전두환 송시를 함께 걸어놓은 것을 비판한다. 서정주 시인의 행적이 밝혀질대로 밝혀진 마당에 문학적 가치도 없는 것을 전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당의 과오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도 않을뿐더러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러한 것들도 망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과를 함께 전시하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망각을 방지해 역사의 교훈을 삼게 할 뿐만 아니라, 미당의 빛과 어둠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에 대해 호의적인 남진우는 이러한 면을 삭제한 채 한쪽 면만을 강조하는 편파적 태도를 드러낸다. 남진우는 작년에 북한에서 개최한 남북 작가들의 모임인 ‘6.15민족작가대회’에 대한 칼럼을 쓸 때도 논리적 편파성을 보인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나 시인의 문장력이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 데에 필요한 문장력을 문인들이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 모든 글에 도통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와 소설은 대개 작중인물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에 비해 신문의 칼럼은 심층적 분석과 저자의 견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와 소설은 독자의 정서에, 칼럼은 독자의 이성에 주로 호소한다. 이처럼 창작과 칼럼은 글쓰기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문인들이 좋은 칼럼을 쓰고자 한다면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심 속에 논리적 훈련을 평상시에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문인들의 칼럼은 대부분 신문사의 구색 맞추기용이나 일회용 대일밴드로 전락할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사적 경험을 앞세운 문인들의 자의식없는 칼럼을 비판했지만 좋은 칼럼을 쓰는 문인도 많이 있다. 폭넓은 인문사회학적 지식과 창조적 상상력을 융합시킨 시인 장석주의 칼럼,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사회현실의 모순을 정치하게 드러내는 시인 김정란의 칼럼, 예리한 분석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평이한 언어로 전개하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칼럼 등은 문인들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좋은 칼럼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안이한 태도나 적당주의는 칼럼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다. 다시 말해 문인들은 거대 신문사나 특정 지배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선봉장형 칼럼’, 양쪽이 모두 잘못이라는 교묘한 처세술의 ‘양비론형 칼럼’, 별다른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눈치형 칼럼’을 경계해야 한다. 좋은 칼럼은 자신의 온몸을 던지는 자세에서 싹튼다. 설사 고용주인 거대 신문사의 입장과 배치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믿고 객관적 논리와 창조적 상상력으로 공적인 발언을 할 때, 문인들의 칼럼은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닌 신문의 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인들이여, 독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타락한 현실과 맞장 뜨거나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칼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최강민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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