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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예술가 평전, 무엇이 문제인가
동향: 예술가 평전, 무엇이 문제인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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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만들기 혹은 자료나열

예술가 평전은 거의 불모지에 가깝다. 국내에서 그나마 출간된 것도 편향된 것이 많아 가려서 봐야만 한다.

미술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이중섭이다. ‘이중섭 평전’(고은 지음, 민음사, 1973/ 향연, 2004), ‘이중섭 평전’(최석태 지음, 돌베개, 2000),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전인권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0)으로 시인, 미술평론가, 정치학자가 다양하게 이중섭을 조명했다. 이 중, 미술평론가들은 고은의 평전을 ‘제일’로 꼽는다.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내밀히 들여다봤으며, 또 그 자체로서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반면 최석태나 전인권의 평전은 “별로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일축한다. 특히 최석태의 경우 “이중섭 신화만들기”라는 것.

 

 

 

 

물론 고은 평전도 아쉬움은 있다. 미술평론가 최열 씨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과도하게 해석한 면이 있다”며 이중섭을 ‘정신이상자’로 본 것을 그 예로 든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전3권)’(학고재, 2002)은 “대중성은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는 게 몇몇 미술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조희룡 평전’(김영회 지음, 동문선, 2003)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많다. 비전문가로서 단지 자료들을 수집, 집필한 것인데 자료수집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예술을 꿰뚫어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용계에서는 최승희 평전이 눈에 띈다. ‘생명의 춤 사랑의 춤’(강이향 엮음, 지양사, 1989), ‘춤추는 최승희’(정병호 지음, 뿌리깊은나무, 1995), ‘춤꾼 최승희’(김찬정 지음, 한국방송출판, 2003), ‘최승희’(정수웅 엮음, 눈빛, 2004)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널리 읽히는 건 전공자의 평전인 ‘춤추는 최승희’이다. 하지만 이 역시 평전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고 보긴 어렵다. 유미희 경인교대 교수 등은 “자료를 많이 수집했지만, 너무 우호적으로 최승희에 대해 서술했다”라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무용계 일각에서는 “최승희의 제자나 유족들이 긍정적으로 쓰도록 유도한”다는 얘기가 나오곤 한다. 가령 친일행적 등에 대한 비판보다는 예술적 관점에서만 보자는 것 등이다. 외국 안무가로는 ‘피나 바우쉬’(요헨 슈미트 지음, 이준서 옮김, 을유문화사, 2005) 평전이 주목할 만하다. 다만 피나에 대해 많은 정보들을 드러낸 것을 두고 정작 피나 본인은 “불쾌해 했다”라는 후문이 있다. 이는 그만큼 예술가의 밑바닥까지 추적해 내려갔다는 것이다.

음악 쪽에서는 ‘증언’(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이론과실천, 2001)이 논란이 됐었는데, 저자가 쇼스타코비치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해 1인칭 시점에서 재서술 한 것을 두고 유족들이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외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글렌 굴드’(피터 F.오스왈드 지음, 한경심 옮김, 2005)는 친구인 정신과 의사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쓴 것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지만, ‘토스카니니’(이덕희 지음, 2004)는 그와 라이벌이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공정치 못하게 대조한 것 때문에 “편향성”이 지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평전’(필립 솔레르스 지음, 김남주 옮김, 효형)은 “결코 평전이 아니”라는 게 한 음악가의 지적이다. 단지 에세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평전이라고 잘못 이름 붙인 것이라는 얘기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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