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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작품을 세심히 관통하는 평전…심리분석 돋보여
생애와 작품을 세심히 관통하는 평전…심리분석 돋보여
  • 정이창 문화평론가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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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비평_『루트비히 판 베토벤』 메이너드 솔로몬 지음| 김병화 옮김| 한길아트| 416쪽 내외| 2006

현대 예술 비평의 대체적인 경향은 예술작품과 창작자를 구분해서 생각한다. 작품의 자율성을 존중해 이를 창작자와 독립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실제로 비평이라는 말 자체에는 작인이라는 개념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술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술가에 관한 글에는 두 가지 잣대를 댈 수 있다. 연대기적 서술이냐 주관적 논평이냐 하는 문제가 하나라면, 작품이냐 인물이냐의 문제가 또 다른 기준이 된다. 물론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가 평전이라는 말을 붙이는 책들은 대개 인물의 적극적인 해석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음악가의 책으로 관심을 돌리면 평전은 고사하고 읽을 만한 책 자체가 많지 않은 형편이다. 명곡 해설서를 제외하면 베토벤, 브람스, 말러, 바그너, 모차르트에 관한 책들이 몇 권 있을 뿐 아직 바흐나 슈베르트에 대한 쓸 만한 책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저명한 음악학자인 메이너드 솔로몬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 개정판이 번역됐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평전을 써서 평전작가로 발돋움했다. ©

국내에서 베토벤과 관련해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프랑스의 문필가 로맹 롤랑이 쓴 ‘베토벤의 생애’(이휘영 옮김, 문예, 1990)였다. 난청이라는 역경을 딛고 음악의 성인이 된 베토벤의 신화를 확립한 책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감상적인 예술가 상에 부합하는 입장에서 씌어졌다.

 

박홍규의 ‘베토벤 평전’(가산, 2003)은 이런 서술적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로 집필된 책이며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손에 의해 베토벤은 타고난 재능은 없지만 노력을 통해 성공한 인물로, 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외고집에 철두철미한 자유인으로, 평범한 대중들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곡들을 쓴 작곡가로 묘사된다. 그런데 과연 위대한 작품을 남긴 예술가의 삶을 그렇게 일상적인 것으로 단순하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의 책에는 일체의 신중함이나 망설임도 없는데, 나는 그가 자료를 폭넓게 살펴본 후에 그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린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해석을 갖고 거기에 부합하는 자료들만 선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더 큰 문제는 음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모차르트에 대한 왜곡은 심각한 지경이다.)

▲박홍규 교수가 집필한 베토벤 평전 ©

솔로몬의 책은 인물의 해석에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가 묘사하는 베토벤은 귀족과 황실을 경멸했으면서도 귀족행세를 했고 그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노력한 인물, 일반 대중의 취향을 경멸했으면서도 그들의 관심을 갈구한 인물, 아버지의 권위를 부인했으면서도 조카 카를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려한 인물, 평생 여성을 사랑하려 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인 여성은 받아들이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상이한 견해들을 소개하면서 베토벤이 갖고 있는 복합적인(때로는 이중적이기까지 한) 면모를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솔로몬이 묘사한 베토벤의 초상에서 작곡가를 더욱 인간적으로 느끼게 된다.

하지만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자신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그는 베토벤의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해 심리적인 분석을 내놓는데, 가령 하이든과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다. 베토벤은 빈에서 하이든에게 작곡을 배울 때 스승의 영향력과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는데, 솔로몬은 그것을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의 권위를 밟고 넘어서려는 외디푸스의 부친살해 동기로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족 로망스’라는 개념은 실제의 아버지에 실망해 그를 부정하고 더 강력하고 높은 존재를 그 자리에 앉히려는 베토벤의 욕망을 설명한다. 한편 동생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내 요한나에게 보인 적대감에 대해서는 그간 좌절된 사랑으로 인해 쌓인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정복욕이 뒤엉켜 표출된 것으로, 조카 카를에 대한 집착은 대리 가족의 건설에 대한 열망이 과대망상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솔로몬의 책은 인물, 시대, 작품이라는 세 요소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여기서 까다로운 것이 바로 작품이다. 작품이란 어느 정도는 인물, 시대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윤리적인 작곡가의 작품을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순박한 작품을 쓴 작곡가는 순박하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이런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환원주의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둘 사이의 관계를 무관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술가의 생애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글들은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거나(생애 따로 작품 따로) 아니면 동등하게 여긴다(박홍규의 평전처럼). 솔로몬은 두 가지 접근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즉, 그는 베토벤의 음악적 특성,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를 산 시민 베토벤, 귓병을 앓고 여성과 가족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간 베토벤 사이를 세심하게 매개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베토벤의 중기의 영웅주의 스타일이 어떻게 형성되고 마감됐으며 침묵의 시기에 이어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요한나와의 소모적인 법적 투쟁이 베토벤의 후기 스타일에 미친 영향력을 설명하는 대목은 조심스럽긴 하지만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작곡가의 삶이 그의 음악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책을 통해 작곡가를 현실의 존재로 느끼고 그의 음악에 다가가는 하나의 지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평전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메이너드 솔로몬이 우리의 손에 쥐어준, 베토벤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지도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정이창 /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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