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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노마디즘의 소비화에 一助
철학자들, 노마디즘의 소비화에 一助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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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_노마드 특집(교수신문 제392호)을 읽고

혼돈 속의 노마디즘
 
기어코 ‘노마디즘’이 시끌시끌한 혼돈에 빠진 듯하다. 탈근대론의 한 자락과 한 가지를 형성했던 주제가 점점 확대되어, 마치 모든 사회적·국가적 구속을 초월하며 달아나는 사유로 확장되더니, 급기야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속의 침략주의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맞기에 이르렀다.

천규석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해 말한다. “몇 차례의 도전 끝에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유목론이 오늘날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하나의 대안 비슷한 것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는 막연한 인상”과,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일 뿐 지속 가능한 생태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없다는 반감”만 남았다고. 이 말에서 그의 논점이 사실은 다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는 유목성을 철학적으로 다른 책에서 별 감흥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무뚝뚝하고 거칠긴 하지만, 직설적 어투로 툭 털어놓는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직접 읽거나 인용하지 못하고 그 책에 대한 해설서를 인용하면서 유목주의를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했다. 그 방식이 지적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이정우의 냉소적 비평은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대로 원전을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에 빠진 것이라고. 이정우의 관점은 여기서 알 수 있듯 전적으로 철학적 관점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되는 ‘유목주의’는 단순히 철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철학적 사상과 문화적·정치경제학적 이미지와 관습들이 뒤엉켜있는 덩어리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 말에 은근히 철학적 혹은 문화적 전위성을 부여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 말을 대충 실용적이거나 비유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용한다. 여기서 혼돈이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광고카피는 후자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며, 별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유적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범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으로 중요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부여받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생태주의자가 열렬한 유목주의자가 된다면? 천규석은 한 때 열렬한 생태주의자였던 김지하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텔레커뮤니케이션 유목주의에 열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울화통이 터졌다고 고백한다.

농사꾼 철학자의 글도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침략과 파괴를 더 조장하는 시장의 권력을 부추기고 조장한다는 데 있다. 이 논점이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닐테지만, 생태주의자는 철학적 논의를 휙 건너뛰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생태주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천규석의 주장과 많건 적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라면, 유목주의의 침략적 ‘뿌리’에 대해 성찰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중요할 터이다.

90년대 초 소개된 탈근대론은 금방 초반기의 저항적이거나 대항적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소비문화를 탈정치적으로 확산시키는 분위기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술이나 매체가 이제 막 무서운 이동성을 보이기 시작한 당시에도, 한편에는 그것의 새로운 의미에 주의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벌써 ‘유목주의’라는 표현은 너무 날렸다.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필자는 1994년에 ‘초월에서 포월로’를 썼는데, 그 글의 부제는 “새로운 유목성 넘어 새로운 정착성으로”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동통신기계의 발달에 대한 찬양이 벌써 고조되고 있던 노마디즘적 상황이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정착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목생활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사람들은 일종의 이동성 존재가 된 듯하다. 이름하여 새로운 노마드. 앞으로 한 동안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한 헌사가 쏟아질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이 새로운 유목성 혹은 이동성은 우리의 몸이 이제 땅의 무게에서 벗어나 가볍게 이동한다는 데 놓여있진 않다. 그 점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점만을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정착성이 생성된다는 데 있다. 다만, 과거의 정착성은 이동성과 반대되는 소극적인 현상인 반면에, 이 새 정착성은 최고도의 이동성을 확보한 상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이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매우 느린데도 보통 빠름보다 빠른 더 빠른 상태…가만히 있어도, 가장 멀리 간 상태.”

그런데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한 예를 들면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사상을 대중화하는 성과를 이뤘지만, 동시에 ‘유목주의’라는 이미지로 단순화되기 어려운 책을 대중적으로 부드럽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 등의 책에서 ‘유목성’은 전쟁기계와 함께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핵심적이진 않다. 오히려 ‘전쟁기계’ 개념이 더 핵심적이며, 바로 그 개념에 의지해 저자들은 국가와의 관계를 풀어가려 했다. 아무리 국가의 포획에 반대한다 하지만 ‘전쟁기계’가 동시에 강조되지 않은 ‘유목주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으로 빠지기 십상인 듯하다. 더욱이 이진경은 ‘코뮨주의’를 말하는데, 이 경우 들뢰즈 등이 그렇게 강조한 ‘전쟁기계’의 까칠까칠한 현존은 희석된 채, ‘유목주의’는 부드러운 공동체의 이미지 속으로 포섭된 듯하다. 들뢰즈 등이 강조한 ‘전쟁기계적 노마드’가 일종의 공동체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기괴한 일이 아닐까. 이 혼동 속에서, 다시 그 책을 인용하며 유목주의를 비난하는 생태주의자도 지역공동체를 말하니, 기괴함은 배가된다.

‘노마디즘’은 왜 이런 혼돈에 빠진 것일까. 최소한 들뢰즈 등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포획장치가 강고하다는 경고와 함께, 분명하게 ‘노마디즘’이 ‘전쟁기계’와 합체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들뢰즈를 말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포획장치는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전쟁기계’는 별로 말하지 않곤 했다. 그 결과 ‘노마디즘’은 무색무취한 디지털 소비문화에 포획되거나 혹은 무작정 국가로부터 도망간다는 낭만적 혹은 무정부주의적 뉘앙스를 많이 가지게 된 듯하다. 들뢰즈 등은 유목주의라도 무조건 국가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아니며 행정기계로서의 국가와 결합하면서도 다시, 또 다시, 이탈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써 ‘유목주의’가 정말 침략적인가, 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정우나 이진경은 그 점을 완강히 혹은 완곡히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나는 오히려 ‘노마디즘’이, 비록 시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공격성과 침략성을 띤다고 생각한다.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 실제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또 들뢰즈 해설자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혹은 ‘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하는데, 나는 그것이 들뢰즈 등의 관점을 제대로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본이 끝없이 흘러다니는 욕망임을 분명히 했으며, 꼭 자본주의를 주적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 확장시키며 한계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그러니 유목주의는 모든 구속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사유이며 침략과 전혀 상관없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념성을 깨야 하지만, 유목주의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역사 속의 모든 침략적 이동성을 비난하려고만 하는 맹목적 생태주의도 자신의 관념성을 깨야 할 듯하다. 복지사회의 이념조차 통째로 거부하는 ‘지역 자치공동체’가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적 이념이라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지금 맞서 싸우려는 ‘유목주의’(대중적 이미지로 떠돌아다니는) 역시 비슷하다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어떤 공격성도 없이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고 소개되는데, 이 이해는 관념화된 철학의 자기만족이 아닌가 싶다.

침략적 이동성은 오늘날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단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오늘의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과거의 유목적 침략성에 쉽게 낙인을 찍을 수 없듯이, 현재의 세계화된 이동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도 오늘의 우리에게도 쉽지 않다. 한국인이 뿌듯하게 여기는 한류도 때로는 침략적이다. 국민기업이라는 삼성전자 및 국민은행의 주식을 60~80% 정도 차지한 외국자본이 토종 자본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그 ‘침략적’ 자본을 당장 내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김진석 / 인하대·철학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해석학.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외에서 소내로’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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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돌이 2006-05-02 01:23:22
'철학'과 무관하지만 철학 해설서들 이것저것 잡식하는 편이고 관심이 많습니다.막상 좋은 번역서 검색해도 댓글리뷰들을 보면 번역이 엉터리네 뭐네, 말이 많아서 기냥 해설서 봐요.뭐 것도 어렵긴 합니다.들뢰즈 관련 해설서만 3권 봤는데 이제 좀 감이 올랑말랑 합니다.그런데 해설서끼리도 서로 비판적이라 제가 감을 제대로 잡았는지도 의심 ㅎㅎ.그러다가 이런 중재글(?)을 보니 반갑습니다.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