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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비평_(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 겸 편집인
문체비평_(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 겸 편집인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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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느낌의 추구 … 위기의식 속의 곡진함

김종철 교수는 ‘녹색평론’을 통해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태위기의 현실에 형태와 초점”을 준 사람이다. 또 특유의 호소력 있는 글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의 심장부”를 건드려 왔다. 한 사람의 진실이 시대와 공감할 때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는 결호 없이 발간되고 있는 격월간 녹색평론의 건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많은 사람이 이것을 김종철 교수 개인의 열정과 집념에서 찾고 있다. 강의 외에는 녹색평론을 위해 온전히 시간과 돈을 투자해온 “확신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열정과 집념은 너무 쉬운 표현이다. 문체로서 드러난 김종철이라는 인간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설득의 원동력을 추적해보는 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의 문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태론자로서의 특징이 글 속에 어떻게 묻어나는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글이 생태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글 자체가 생태적으로 살고 있는지 말이다. 생태론자의 생태적인 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의미를 전달하고, 느낌과 감동을 주는 말의 존재이유를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을 문자 체계 속에 그다지 많이 구겨 넣어버리지 않는, 구어체의 살아있음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가들이 말과 글이 일치하지만, 가령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경우 머리 속에서 사회과학적 용어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며 내뱉어져 말이 이론에 가깝다면, 김종철의 경우 오히려 글이 말에 가깝다는 점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분석가에서 이야기꾼으로

그렇다면 김종철의 생태학적 철학은 어떻게 글에 묻어나는가. 가령 그는 고기는 먹지 않지만 가끔 생선도 먹고 라면도 먹는다고 한다. 기자들이 찾아오면 자신은 비빔밥을 시키고 손님은 갈비를 먹인다든지, 텔레비전에 중독돼 아직 끊지 못했다고 털어놓은 걸 본 적이 있다. 따라서 그의 생태주의는 금욕보다는 소탈함 쪽이다. 그가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조금 더 가난해지는 것’은 산업화로 인해 왜곡된 욕망을 재조정하는 것이지 어떤 규율을 정해놓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김종철의 글은 조금씩 가난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는 꼼꼼한 분석가에서, 폭넓은 사상가로 그리고 ‘이야기꾼’의 모습으로 바뀌어왔다. 논리와 관점으로 꽉 짜여져 있던 글이 풀어지면서 그 육질이 풍만해졌다가, 가지치기를 하면서 강물과 같은 길고 홀쭉한 물길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략 첫 번째 문학평론집인 ‘시와 역사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78), 두 번째 평론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1999), 녹색평론에 쓴 글을 모아놓은 ‘간디의 물레’(녹색평론사, 1999)와 일치한다. 하지만 그가 강물이라고 관조적으로 흘러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요즘의 그를 보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30년 전에 쓴 ‘이야기꾼의 소멸’(1977)이란 글에서 “한 곳에 뿌리박고 사는 삶에서 나오는 너그러운 분위기가 없어지면서 이야기꾼도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에는 이야기라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며 그리움을 내비치고 그 그리움이 단순히 복고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부인과 함께 번역한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1996)라는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걸 부지런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게 지난 10년간 녹색평론에 썼던 글들이다.

‘책을 펴내며’라는 발행으로서의 글은 생태위기의 현실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종의 ‘通信’이었다. 아니 녹색평론 대다수의 글들이 이방의 소식이나 우리의 상상력이 빈곤해지는 의식의 오지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는 기능을 했다. 소식을 전하는 자는 바지런해야 한다. 김종철의 글에는 그가 인터넷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찾아낸 생태와 관련된 소식들이 선물꾸러미처럼 항상 들어있었다.

이 ‘이야기통신’이란 관점에서 그의 문체적 특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게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그의 통신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대북·대남방송’ 같은 확신에 휩싸여 있다.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것이다. 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논설조와 웅변조 같은 강렬한 어법을 통해 윤리적 충격을 도모하는 글이다. 따라서 이걸 완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지도 모른다’와 같은 완곡한 표현인 셈이다. 물론 이 모든 게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를 인터뷰하러 온 무례한 어떤 이에게 버럭 화를 냈다가도 나중에 수그러진 음성으로 달래주기도 했다는 그의 품성이 반영된 것일 테다. 가만히 보면 김종철은 내가 어떻고 하는 표현은 잘 쓰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글에서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한다.

완곡어법을 쓰는 ‘확신의 인간’

이 또한 완곡어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 산이 깎여나가고 나무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행태를 보면서 그가 느끼는 울화증, 집근처에서 공사를 하자 한달간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가 돌아온 에피소드 등을 듣다보면 서양에서 말하는 ‘에고’와 유사한 자아의 취향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글을 어떤 고립감과 아득함의 공간으로 밀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데, 이 ‘우리’라는 주어는 그의 글에서 그런 편향성을 채찍질하고 균형을 잡도록 권유하는 약속의 언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철의 글은 만연체이다. 문장이 길다는 뜻에서도 그렇지만, 하나의 문장이 길게 숨을 내뿜는 글쓰기가 아니라, 판소리의 추임새 같은 몇가지 새끼 호흡을 거느리면서 여유있게 글을 끌어가는 것을 얘기할 수 있다. 만연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소설가 박상륭이 ‘죽음의 한 연구’에서 거의 한 페이지를 한 문장으로 쓴 적이 있는데, 이것은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위대함과 허풍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무모한 것이면서 그 무모함을 문체에 스민 神性의 도취를 통해서 무마시킨다. 그와 반면에 김종철에게 만연체가 생겨나는 동기는 대개 “주어진 대상의 여러 가능성을 철저히 검토함으로써 어떤 결론에 이르려는” 분석가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김종철이 사물을 샅샅이 뒤지는 이유는 철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태도, ‘느낌’이라는 감각적 인식행위에 대한 특유의 신뢰 때문이다.

위기의식을 엔진삼는 비평적 사유

그는 느낌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느낌은 시적인 확신과도 비슷한 것으로 글의 엔진이다.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시인 블레이크가 “지각의 문이 깨끗하게 되면 인간에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듯 김종철에게 “동굴의 좁은 틈 사이를 통해서만 사물을 보게 된 인간이 그의 인식의 한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인간 자신의 감각기관 전체를 발전시키고 즐겨야 한다”는 깨달음이 놓여있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느낌을 언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반성적으로 느낌을 다듬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서는 어떤 언명을 하고 난 후나 전에 잠깐 멈칫하는 순간, 마치 잔기침과도 같은 부사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과연, 별개로, 적어도, 새삼스럽게”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이와 비슷한 얘기인데, 김종철은 어떤 사안의 의미를 파고들 때 항상 가장 표면에 있는 것부터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벗기고 들어가서 궁극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는 말과 함께 그것을 생태론적 현실과 연결시킨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장황한” 이런 식의 글쓰기는 생태학적 현실이 가장 근본적인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생태학적 주제가 여타의 삶의 조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안팎으로 긴밀히 관계되어, 생태학적 현실이 무너지면 다른 것도 무너진다는 점을 일깨우는 데 톡톡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종철의 글은 아무리 그냥 하는 말처럼 읽혀져도 대부분 비평이다. 김우창 교수가 정확하게 짚어낸 바에 따르면 “공정한 눈으로 선입견과 상투성 없이 직관된 경험의 표현을, 같은 공정함을 가지고 식별”해 낸다. 하나 덧붙여 김종철의 글이 비평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끔찍한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한 이들”이라는 브레히트의 시구에 보이는 ‘위기의식’이 항상 글의 전면에 돌출돼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황우석 사태에서 “젓가락이 인간 난자를 이리저리 공격하는 화면에 한 달이나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식의 끔찍함의 발견이라든지, “깊이와 교양이 갈수록 상실되어 가고 있는 정신적 삶의 공간”처럼 점진적 상실에 대한 경고의 표현으로도 여러 번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탄식이 묵시록을 형성하지 않고, 미래에의 확실한 전망, 그 실현을 위한 살이 양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식으로 뻗어나간다는 점은 ‘절망’을 절대화하는 못난 시적 인간과는 또 다르게 그의 글에서 정치적 인간, 더 정확하게는 ‘자연의 정치’를 읽어내게 한다. 그는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신념의 인간인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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