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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제적 연구의 어려움 … 과거사청산 사유 확장
학제적 연구의 어려움 … 과거사청산 사유 확장
  • 안병직 서울대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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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필자는 지난 2002년 8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년여 동안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역사와 기억 - 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학술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필자가 연구책임자로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기초학문분야의 연구, 특히 박사급 신진 연구인력을 지원하기 위해 학술진흥재단이 2002년도에 처음으로 시행한 기초학문육성사업의 여러 지원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필자는 역사와 문학 전공자들로서 도합 30명이 넘는 공동연구원이 참여한 이 대형 연구과제를 이끌면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적지 않은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기초학문육성사업은 그동안 연구 활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미흡하였던 인문학 분야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특히 대부분 시간강사로서 활동하면서 안정된 연구 여건을 갖지 못한 박사급 공동연구원의 경우연구비 수혜 기회는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동연구의 방식, 즉 전공 학문 영역이 다른 연구자들 사이의 학제적 연구방식은 구체적인 연구 성과와는 별도로 시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 젊은 연구자들이 상호 교류하면서 인접 학문의 성격을 이해하고 세부 연구주제를 넘어 폭넓게 학문적 관심사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연구의 큰 이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이 연구과제가 표방한 학제적 연구를 제대로 실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다수 연구자에게 학제적 연구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전공이 상이한 연구원들 사이에서 연구 내용을 세부적으로 조율하기가 힘들었다. 즉 공동연구자들 가운데 문학과 역사전공자들은 문제의식 혹은 문제를 보는 시각이나 접근방식에서 논문의 구성과 서술방식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동안 익숙한 전공영역의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탓에 가시적인 연구 성과는 초라하다. 학술지에 개별적으로 발표한 논문을 제외하고 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함께 묶은 것은 단행본 1권이 전부이다. 그리고 필자를 포함하여 10명의 공동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단행본의 집필자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전체 연구자의 1/3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대형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역량이 부족하였던 연구책임자에게 있으며, 그 점에서 필자는 책임을 통감한다. 


동시에 필자는 연구책임자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연구과제에 참여한 박사급 공동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기초학문육성사업의 취지에 부응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연구기간 내내 독려하였다. 하지만 연구에 임하는 자세는 연구원마다 큰 차이가 있었으며, 일부 연구원의 경우는 학문적 성취능력을 떠나 성실성의 측면에서도 다소 실망스러운 면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성취위주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연구원을 통제하기란 우리 실정 상 무리라고 판단하였다. 특히 박사급 공동연구원들에 대한 지원을 연구책임자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이 미리 일률적으로 확정해 놓은 지원방식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연구책임자가 연구원들의 성취도를 평가해서 인센티브의 형태로 일정한 한도 내에서 지원을 차등화 하는 방식은 어떨까 싶다. 그러나 연구비 지원제도와 방식을 개선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연구자 개개인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잣대로 결코 부끄럽지 않은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이 기초학문육성사업과 같은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취지를 살릴 뿐 아니라, 나아가 학술활동의 지원 및 평가와 관련된 온갖 제도적 장치가 점점 더 짐스럽게 느껴지는 세태에 학문의 자율성을 지키는 길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변명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수행한 연구과제의 외형적 성과가 단행본 1권으로 그친 것은 나름대로 일정한 성취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필자는 전문적인 학술연구 성과를 대중화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단행본 출간을 구상할 때부터 집필진의 구성을 통해 연구에 참여한 공동연구원들에 대해 그간의 성취도를 평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최소한 이 책의 경우만 놓고 본다면 필자가 연구책임자로 참여한 프로젝트의 성과가 비록 양적인 측면에서는 변변치 못하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달리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정의 연구기간이 종료된 뒤에도 근 10 개월가량 추가적인 작업을 통해 출간한 이 책이 과거사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에 깊이를 더하는 데 나름대로 일조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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