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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지만 대형과제로는 빈곤하지 않은가
반갑지만 대형과제로는 빈곤하지 않은가
  • 조승래 청주대
  • 승인 2006.05.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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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구비평: (1) '역사와 기억: 과거사청산.국가별 사례연구'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과거 청산보다 더 논란의 대상이 된 사회적 아젠다도 드물다. 근 세 세대 동안 식민 지배와 독재라는 불행한 과거를 경험하고 비로써 최근에서야 민주화를 성취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청산은 간단한 일이다.

과거에 잘 못된 점을 규명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반성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일종의 공통의 기억을 내면화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는 논의의 일면을 보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잘 못 된 행위의 규명의 대상이 되는 집단과 그 후속 세대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행사하면서 우리 사회의 일정 부분 이상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일말의 기여도 하지 않은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거대한 규모의 고도 산업 사회에 접어들어 흑백논리로 양편을 가르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그 무엇보다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겪은 실존적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거나 전승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건 과거 청산 그 자체를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문제는 어떻게 그 문제를 합리적이고 발전적으로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이 경험한 과거 청산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자못 의미가 큰 작업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과거 청산의 정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각 나라마다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 따라 상이한 해결 방식을 추구한 것을 성찰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들을 시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서울대 서양사학과 안병직 교수팀이 지난 2002년부터 2년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역사와 기억-과거청산과 문화정체성 문제의 국가별 사례연구’라는 학술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 결과물로 안병직 교수외 열명의 학자들의 글을 묶어 <<세계의 과거사 청산>>(푸른 역사, 2005)을 펴낸 것은 시의 적절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30여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공동 연구의 성과물로는 좀 빈약하다는 평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참여한 모든 연구자들이 학진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전문 학술지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연구 논문을 게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의 연구비(18억 5천만원)가 투입된 프로젝트인 만큼 그 결과물을 엮어내는데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는 학계 외부의 시각은 그리 잘 못 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 독서 대중이 접근 가능한 형태로 결과물을 펴냈으면 훨씬 더 연구 성과가 빛났을 것이다. 물론 연구 책임자로서 연구자들에게 요구한 수준이 있었고 이 수준에 맞는 글들을 뽑아 대중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사 청산을 얘기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도 더러는 빠지게 되고 익히 들어온 독일과 프랑스등 유럽 국가들의 이야기가 좀 더 자세하게 심층적으로 기술된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물론 이 책에는 남미 국가들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근의 이야기도 들어 있어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필자로서는 이 책의 세세한 내용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 구도상 아쉬운 점만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이론적인 글들을 앞에 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과거 청산은 그 대상이 되는 과거 역사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과연 역사는 과거를 도덕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역사 이론에서 최근까지 자주 논의되던 문제여서 (역사 이론의 전문 학술지인 History and Theory도 최근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다시 한 번 쟁점을 정리하고 최근의 연구 경향을 소개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연구 책임자인 안병직 교수가 역사 연구와 교육이 단순히 도덕적 규범을 제시하는 것에 그친다면 추상적이고 알맹이가 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와 아울러 역사와 기억에 관한 이론적인 글도 실었어야 했다. 이 문제는 최근 서구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학계에서도 심도 깊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인디애나 대학에서 나오는 전문 학술지 History and Memory와 전진성 이 쓴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휴머니스트, 2006)을 들 수 있다.) 사회적 기억 만들기, 기억의 과잉과 남용, 기억의 의무 등에 입각한 기억의 정치를 바람직하지 못 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안병직 교수의 입장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볼 때 안병직 교수가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발저 논쟁’을 몇 줄로 짤막하게 소개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프로젝트의 명칭이 암시하고 있는 과거 청산에 대한 문화사적 접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과거 청산을 시도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문화적 콘텍스트가 과연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일부 보수 언론들이 이 책이 마치 스페인 식 망각을 통한 청산이 과거 청산의 바른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 받을 소지가 있게 잘 못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그 부분을 맡은 필자들은 전혀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김원중 연구원은 그것으로 인해 스페인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망각에서 깨어나 기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임호준 연구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페인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어서 그 결과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 책임의 일부는 아마도 서설과 보론을 집필한 안병직 교수의 논조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동 연구의 책임 연구원은 이러한 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최근의 학진 지원 사업을 계기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우리 학계의 대형 공동 연구 관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공동 연구는 연구자들이 평소 연구하던 주제를 가지고 유사한 시각에서 연구하던 연구자들과 팀을 이루어 그야말로 공동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소규모 공동 연구 위주로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학진이 이를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 
 
조승래/청주대·서양사

필자는 서강대에서 ‘18세기 공화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논저로는 ‘국가와 자유 -서양 근대 정치 담론사 연구’,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19세기 영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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