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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윤평중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394호)에 다시 답한다
재반론: 윤평중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394호)에 다시 답한다
  • 정대현 이화여대
  • 승인 2006.04.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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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언어’에 맡겨?…“지성의 포기 아닌가”

▲교수신문 제394호에 실린 윤평중 교수의 재반론 ©

윤평중 교수는 그의 서평(교수신문 제392호)에 대한 나의 반론(제393호)을 반박(제394)하고 있다. 성기성물(成己成物: 나의 이룸과 다른 만물의 이룸은 맞물려 있다)의 명제를 내가 대안적 ‘근본’ 가치로 제안하는 것은 가치의 복수성을 요구하는 다원주의 시대에 역행한다고 주장 한다; 자유와 평등은 ‘근본’가치가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부인하여 이들이 ‘기본’가치인 점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 한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절충을 위해서는 성기성물 명제의 상위체계를 필요로 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절충주의가 오히려 다원주의 시대의 문법에 충실한 하나의 상위체계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윤 교수의 반박을 차례로 고려하고자 한다.

윤 교수는 그의 ‘기본’ 가치와 나의 ‘근본’ 가치는 같지 않은데도 나는 이들을 동일시하여 혼란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내가 이들을 동일시한 것은 참이지만 그것이 왜 문제를 야기했을까? 윤 교수는 <기본가치는 다원주의적이고 복수적이지만, 근본가치는 비다원주의적이고, 비복수적>이라는 방식으로 그 차이를 설명한다. 물론 ‘기초’를 비본질주의적으로, ‘근본’을 본질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윤 교수의 염려가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나의 논의의 논리를 빗겨 가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긴장은 이 가치들을 본질주의적으로 해석할 때도 발생하지만, 비본질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도 두 가치가 서로 일차적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초’나 ‘근본’의 호칭 문제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갈등은 어느 가치가 “더 기본적인가?”의 우선순위 선택의 물음의 문맥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맥적 호소' 이외에는 별다른 합리성 없어

윤 교수가 제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다원주의 시대에 성기성물 같은 획일적 가치가 웬 말인가라고 묻는다. 내가 성기성물을 대안적 ‘근본’ 가치로 제안하는 것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성기성물을 모든 체계에 적용할 수 있고 모든 체계가 수용하여야 하는 그러한 가치로 간주한 것이다. 성기성물을 그러한 의미에서 체계 독립적 가치, 절대적 가치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책의 표현들로부터 그러한 인상을 받았을 수 있지만, 이것은 책 전체의 그림은 아니다. 나의 의도는 성기성물이 모든 체계가 공유할 수 있는 그러한 가치라는 것이다.

소위 ‘공유가치’라 불리는 개념은 공지칭(co-reference)성으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뉴톤의 ‘빛’과 아인슈타인의 ‘빛’이라는 동일한 기호들은 다른 체계에 속하므로 뜻이 다르고 따라서 다른 단어들이 된다. 그러나 이 기호들이 지칭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래서 빛에 대해 어떤 체계가 과학자 공동체의 목적에 더 만족스러운가를 물을 수 있다. 두 체계의 ‘빛’이라는 기호가 동일하게 지칭하는 공지칭성은 그 사물적 대상에 대한 최초의 직접 지칭성에 기초한다.

성기성물이라는 가치도 체계 의존적이지만 여러 체계에 의해 공유될 수 있다. 그러나 공유가치의 공유성은 여러 체계가 같이 ‘소유’할 그러한 가치가 체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기성물은 여러 체계가 독립적으로 구성한 가치이지만 성기성물의 ‘공유가치성’은 여러 체계의 그 역할의미의 가족유사성을 공지칭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원주의는 구조적으로 옹호되고 있는 것이다.

윤 교수는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성기성물의 가치체계 보다 ‘절충주의’의 도입이 다원주의 시대에 더 맞는 접근이라 생각한다. 두 가치의 관계의 지점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상위체계의 필요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패러다임론이 시사하는 대로 “불교와 기독교 중 어느 종교가 더 종교적인가?”의 물음은 대답자가 상위체계의 설정 없이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위의 두 체계를 비교하거나 선택하기 위해 상위체계를 필요로 하고, 우선순위 선정, 설명, 정당화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절충주의’는 어떤 의미의 상위 체계일까? 한국의 일상적 삶의 문맥도 체계가 요구하는 일관성, 정합성 등의 조건들을 만족한다는 뜻에서 하나의 체계라 할 수 있다. 소위 ‘일상 언어 체계’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이해 갈등의 조정은 이러한 상위언어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지구촌 공동체는 인간 자연종 체계를 이룬다. 인간 자연종 체계 안에서 여러 자연언어들이 상호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연종 체계가 자연사의 부분이라는 점에서 원초적 체계라면, 한국일상언어는 그 원초적 체계의 한 부분 체계이다.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을 말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원초적 체계가 요구하는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윤 교수는 논의, 합의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초적 체계의 합리성은 한국의 양극화의 현상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리는가? 문제는 윤 교수가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가자고 제안할 때, 이 ‘절충주의’적 체계는 문맥적 호소 이외의 합리성을 제시하는 것 같지 않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자유, 평등, 성기성물 같은 가치는 자연사의 부분이 아니고 사람 또는 인간 공동체가 선택하는 지성적 구성물인데도, 이들의 절충적 조정을 원초적 체계에 맡긴다면, 그것은 지성의 포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성은 처음부터 자유 평등을 말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윤 교수의 자유나 평등은 인간론의 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이라 할 수 없다. 자유란 개인에 한정하는 인간 존재의 한 국면적 경험이고 평등도 인간관계의 한 부분의 조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에 평등과 배려를 첨가하고 민주주의 같은 다른 항목들을 더 추가하여 균형을 맞출 수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 병열적 연접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인간론이어야 하는가. 인간 삶의 문제는 무엇일까. 어떤 관점으로부터 그러한 문제에 접근할 것인가. 인간 연대성을 향한 부정성 경험 극복의 소수자 관점이 그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치론을 가장 일관되게 유지해온 인간론이 여성주의가 아닐까. 그리고 여성주의는 성기성물 명제로 요약되지 않을까. 이 명제는 최소 인간론의 하나의 충분조건이 아닐까.

정대현/ 이화여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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