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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동양담론은 새로운 세기의 대안인가
[기획대담] 동양담론은 새로운 세기의 대안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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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7:41:34
본지 203호부터 206호까지 계속된 '동양담론' 논쟁의 결산 대담이다. 애초 김진석 인하대 교수와 김성환 군산대 교수간의 논쟁으로 시작된 이 논쟁은 이른바 '동양담론'의 대안적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마무리 좌담에는 최초의 문제제기자인 김진석 교수와 동양철학을 전공한 정세근 충북대 교수가 참여했다.

교수신문 '동양담론 논쟁'을 돌아본다

정세근 : 이 논쟁에서 동양철학자가 반발한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동양철학자들도 옥시덴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데 서양철학자가 옥시덴탈리즘이라 비판했기 때문이죠. 서양철학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동양철학, 그것도 유가에게 '핍박' 받아왔던 도가를 비판했으니 반발이 더 컸을 겁니다. 서양철학자들은 동양의 옥시덴탈리즘 비판과 함께 서양의 오리엔탈리즘도 비판해야 합니다. 기독교 문명권과 유교 및 회교 문명권의 전쟁 시나리오인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대해 제대로 비판해본 적이 있나요. 오히려 독일학자가 나서서 문명의 충돌이 아닌 '화해'를 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용옥의 경우, 이런 전쟁 와중에서 나온 도승의 '고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터졌는데 고승이 한마디 한다고 달라지진 않죠. 그의 가장 큰 오류는 노자와 공자가 모두 옳다는 데 있습니다. 도가와 유가는 치열하게 서로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화해를 하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거야말로 철학적이지 않은 접근입니다. 그는 훌륭한 번역자이지, 당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자는 아닙니다.
김진석 : 저 스스로 서양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플라톤 이래의 서양중심적 철학을 비판하는 작업을 해왔고, 논쟁의 출발이 된 처음 글에서도 동양학만이 아니라 서양학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동양철학 혹은 도가가 처한 현실적이며 우울한 상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저의 논점이 일방적으로 '서양패권주의'로 왜곡된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저는 동양철학자들에게 간곡히 요구합니다, 서양철학(자)을 기꺼이 비판하라고요. 전공이 다르다거나 할 수 있는데 안 한다고 둘러대지 말라고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안 한다고 말하지 말라고요. 안 하는 것은 대부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서양을 나누는 잘못된 칸막이가 없어질 겁니다. 동양과 서양의 구분에 대해 저는 비판적입니다. 中體西用, 和魂洋才와 달리 東道西器에서 문화적 주체가 매우 불분명하고, 동양을 관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틀림없이 있으니까요.

정 : 동의합니다. 서양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을 하기 때문에 쉽게 타자화할 수 있지만, 동양철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철학, 한국철학, 일본철학 식으로 나누려 하지만, 슬그머니 동양이라는 말을 빌리기도 합니다. 동양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편애하는 경향은 문제지요. 한국의 '동양철학자'는 동양철학과 '한국철학'을 모두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더 버거운 형편입니다. 이런 구분이 공고화된 것은 대학제도의 측면도 있겠지만, 철학자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노자 전공자가 열명 밖에 안된다면 무슨 얘기가 되겠습니까. 기초가 쌓여야 할말도 있고, '東西'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 : '서양철학자'도 서양과 한국을 동시에 해야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운명입니다. 또 오늘날 문제는 인문학자의 수가 적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과잉이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축적된 학자의 수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어느 대학에는 철학과 대학원생이 학부생의 몇 배인 1백50명을 넘고, 국문학과는 2백50명이 되더군요. 동서양 철학이 이렇게 서로 백안시하는 상황에서 저는 차라리 동양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은 동양학부로, 서양 고전을 해석하는 사람은 서양학부로, 그리고 우리시대의 당면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은 따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동서양철학의 구분은 한국화, 동양화, 서양화의 구분만큼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의 틀 안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지, 해석의 문제를 두고 내가 더 공부했다, 누구는 전공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일입니다. 철학과 폐지와 맞물려 의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구분이 철학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봅니다.

정 : 동서의 구분을 넘어서야 한다는 철학의 '보편성'에 관한 논쟁에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양철학자였습니다. 동양철학자는 부정적이었죠. 철학이 보편적이라고 해도, 모든 문제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학자 촘스키가 말하듯이 현재 문제삼아야할 '보편성'은 미국적 보편주의입니다. 미국 철학계에서 활동하는 김재권 박사의 물리주의는 '현대유물론'입니다. 그의 업적은 미국의 이익과 적지 않게 맞물려 있죠.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은 서양철학계 내부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가의 현대적 해석, 어떻게 볼 것인가
정 : 유가사상은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공자의 宗法제도를 보죠. 이 제도는 가부장제의 전형이자 그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정주영회장 때의 현대그룹처럼 말입니다. 공자는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그 당시의 정치적 여건 속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공자에 대한 비판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 공자를 비판했을 때 그에 대한 찬성 글을 쓴 것도 양적인 중용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제대로 된 비판은 불가능하지요.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80년대 미국의 논의를 90년대 들어와서 반복하는 상황도 우스운 것입니다. 그 개념은 싱가폴의 이광요가 자신의 정치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양한 것인데 말입니다. 사회과학자들이 유가 등의 동양철학을 수용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 속에 어떤 환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공자 노자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고대의 논의만을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김 : 일단 공자나 노자가 봉건적이었다는 단순한 비판은 경계해야겠지요. 오늘의 척도를 과거에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고 또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 안에서 그들의 사상적 텍스트는 나름대로 가치를 가집니다. 그런데 유가의 사회철학적 측면을 긍정하더라도, 수양론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수양이 있고 사회적 차원의 수양이 있다면, 당시는 인본주의적 원칙이 작동하는 비교적 단순한 사회였기에 이 두 측면 사이에 어느 정도 통합적인 조화가 가능했죠.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두 측면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유가처럼 도덕적 수양을 사회적 실천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설정한다면, 오늘날 너무 이상적인 도적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선정적인 분위기를 비판한다면서 다시 선정적으로 도덕을 빙자하는 일을 '선정적 도덕주의'라 할 수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 선정적 도덕주의에 빠지는 실수를 계속 반복합니다.
정 :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대형사고가 터지면, '안전불감증' 운운하면서 전국민의 도덕성을 문제삼습니다. 대체 성수대교 붕괴와 국민 개인의 도덕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계해야할 수양일반론, 도덕제일론이지요. 개인에게 도덕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음모'일 겁니다. 유가의 '도'와 '덕'이라는 것은 현대적으로 '이론과 실천' 또는 x와 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는 비어있음, 虛位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대입이 필요하죠. 인의예지신을 오늘날의 문제에 대입시키자면, 예컨대 智 = 정보사회, 信 = 신용사회같은 식이죠. 유가사상에 새로운 대입점을 찾는 작업, a와 b가 아니라 a', b'의 값을 찾는 작업이 현재의 철학입니다.
김 : 사회적 분열과 혼돈의 와중에서 인격적 완성주의는 명백한 한계를 가집니다. 수양의 두 측면이 서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그 분열을 전제한 후에야, 아마도 개인이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덕목으로 '수양'을 설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가에 대한 비판은 사회주의 중국이 비교적 다양하게 시도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국과 대만에는 탈정치화된 부분이 많고, 보편적인 인간의 수양으로 몰아가려는 경향이나 음모가 뿌리깊습니다. 더 나아가 유가의 정명론적 태도가, 사로 '차이'를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평등을 요구하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분석해야 합니다.

정 : 효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며느리는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리도 있는 겁니다. 종법제는 부자관계를 중심으로, 그 관계를 사회적으로 유비시킨 것이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가족 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친상을 당했다고 정치인이 임무를 방기해선 안되죠. 조건이 바뀐 사회에서 똑같이 충효를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중국의 현대 신유학을 연구하는 鄭家棟 교수가 퇴계의 집에 자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바로 그 점이 한국 유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타자화하고, 객관화해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유가의 발전은 전대에 대한 비판 속에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한편, 저는 곳곳에 남아있는 향교를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립니다. 이게 현재에도 살아있는 단절되지 않은 전통이라는 사실 때문이죠. 하지만, 학회의 행사가 문중의 행사이기도 한 현실에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작업은 어렵습니다.

노자와 해체론은 접목될 수 있는가
정 : 노장과 해체론에 관해 동서양 학자들이 만나 함께 논문을 쓴 것은 매우 발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해체의 해체'라는 평문을 썼습니다. 노장이 해체론이라는 선언적인 문구만 있지, 노장 자체를 해체할 생각은 없더군요. 이것과 저것이 같다라는 것은 무의미하죠. 진정한 해체의 작업이 수행되어야 입니다. 노장은 해체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인 거죠. 김진석 교수가 노자를 통치술로만 보신 것은 안타깝습니다. 노자사상도 역사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노자와 왕필이 다르고, 장자와 곽상이 다릅니다. 왕필은 '물'을 "사람은 모두 치도, 즉 다스림에 마땅히 응해야 한다.〔人應於治道〕"고 봅니다. 이점은 물은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데로 흐른다는 노자의 입장과 다릅니다. "말과 소의 고삐를 죄는게 자연〔天〕인가, 인위〔人〕인가"라는 물음에 장자는 인위라고 보지만, 곽상은 마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命)이라고 봅니다. 이런 곽상의 말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전체 속의 개인〔獨化於玄冥之境〕이라는 의미인데, 위험한 논리죠. 漢대, 魏晉 시대를 거치면서 노장학이 변질된 측면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노장학 자체의 저항적 측면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후대의 혁명가는 장자을 바탕으로 혁명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장자에 평등과 자유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죠.

김 :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성외왕의 사상인 한 노자에도 통치술의 측면이 분명히 있는데 한국에서 그것이 거의 무시된 것이 아닐까요. 이제까지 정치적 변화가 중국처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힌 적이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노장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 관념화에 빠져 있고, '자연'이나 '무위'에 근거한 저항도 미미한 듯합니다. 지적인 차원에서도 '무위자연'은 실천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허위나 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지독하게 정치적이면서 말로는 쉽게 무위자연을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예로 김용옥은 "有爲는 인간세에 엄존하는 죄악"이며 "자본주의 시대에 교육은 철저히 비자본주의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바로 이런 위선적인 무위자연을 비판하는 겁니다. 무위자연을 순백의 본질로 실체화하면서 형이상학적 도덕주의로 빠지고 있으니까요. 인간은 유위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무위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직접적으로 무위에 도달한다고 믿는다면,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아닐까요. 무위자연을 우상화할 경우, 성·계급·인종 등의 사회적 맥락에서 추상되기 십상일 것이라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운동이나 저항의 측면에서, 또 개인적인 실천이나 공동체적 실천의 차원에서 '자연'적 태도를 강조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지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미세한 개념적 구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이념적인 불평등과 차이가 엄존하는데, 보편적인 무위자연만 강조하는 것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위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저는 노자에서 '물' '부드러움' '여성'이 내포한 추상적인 상징주의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정 : 그동안 저는 노자의 여성성을 계속 강조해왔습니다. 노자에게 여성성은 유약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죠. 이런 말은 여성학자들에게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런 노자의 여성성은 유가적 전통의 강한 체계에 저항하기 때문에 여성학자들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개념이죠. 물론, 공자, 맹자뿐만 아니라 노자, 장자도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김 : 균형이 중요합니다. 비판이 수용된다면 동서 구분없이 함께 할 수 있겠죠. '疏外에서 疎內로', '超越에서 匍越로' 등의 개념을 말하는 저는 동서양철학 모두에서 왕따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양철학자들은 그들이 서양철학에서 못 본 개념을 쓴다고 비판하고, 동양철학자들은 동양철학의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합니다. 해체론도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저는 데리다적 텍스트를 가지고 해체론을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동서의 맥락이 다르기도 하고 데리다는 지나치게 텍스트 중심주의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죠. 데리다적 해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계속 반복하는 가운데서만 가능합니다.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개념들이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지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노자를 해체론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유보적입니다. 노자를 데리다적으로 보는 것으로 20년 전에 이미 외국에서 했던 작업이죠. 지금에 와서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맥락이 맞질 않습니다.

'철학의 현실화, 현실의 철학화'라는 과제
정 : 우리 현실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유가를 비판했다고 유림이 학자를 고발하기도 하고, 심도있는 작업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매체지향형 엔터테이너가 되어 가고, 동서양 철학이 각자 일방통행하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처럼 역설적입니다. 소로스는 열린 사회를 주장하는 포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퀀텀펀드의 이사장이기도 하죠. 인권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생명공학은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도 있죠. 이같은 '문제현실'들이 바로 '한국철학'을 하는 대전제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글쓰기가 공허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변의 시대에서 수사의 시대로, 사색의 시대에서 표현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해도 착실한 글쓰기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스웨덴의 웁살라대학 강당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위대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은 더 위대하다"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또,지금의 철학계에는 '전공주의' 타파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비판이 가능합니다. 저는 학제성이 아니라 學內性을 강조합니다. 노자와 공자도 못만나는데, 어떻게 동서가 만날 수 있습니까. 이제는 같음에서 다름으로 나갈 시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노자와 데리다가 같다는 하위수준보다 노장과 데리다가 다르다는 상위수준에서 우리의 문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김 : 철학과도 폐지되는 상황이고, 철학교수들조차도 서로 대화가 안 되는 마당입니다. 저는 모든 대학에 철학과가 있어야 한다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이 일정하게 축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학·경제학·과학 기술·문화 예술 영역과 섞여야지요. 노자 공자만 끝없이 해석하고, 칸트 데카르트를 끝없이 해석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철학계의 자기성찰이 부족합니다. 한 예. 윤리교육에 관한 교육학과의 입장을 비판한 것은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윤리의 부재가 철학이나 윤리교육의 부재 때문이라는 철학계의 대응은 철학의 폐쇄성을 보여주었다고 여겨집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죠. 고전만을 공부하는 철학은 사회변화를 직접 유도하기는커녕, 사회적인 맥락을 따라가지도 못합니다. 동서양의 커다란 텍스트에만 빠져있지 말고, 구체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현실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정 : 다른 단과대의 교수들은 우리 사회에 '철학'이 없어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과 육성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되물으면 '그건 당신들 문제'라고 합니다. 말로는 철학이 문제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문화권력의 폭력으로나 맛뵈기로 철학을 접하고 있는 실정이죠. 철학이 상실되는 상황이지만, 문명비판의 역할이나 인문학적 교양, 종교적 위안의 역할은 여전히 철학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김 : 그러나 이른바 '철학위기론'에는 공허함이 있고, '철학의 부재가 문제'라는 말에도 묘한 상투성과 이중성이 있죠. 말로는 주체적인 사상이 필요하다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철학교수는 동서양 고전 연구자에 불과한 상황이 아닌가요. '탈'-형이상학, '疎外에서 疎內로', '超越에서 匍越로' 의 관점에서 글을 써온 저는 동서양철학계 양쪽에서 외면당하고 있지요. 서양쪽은 서양적 개념이 아니라면서, 동양쪽은 '동양적'이지 않다면서 한국적인 작업을 싫어합니다. 철학 교수들은 진지하게 자문해볼 필요가 있어요. 오늘날 철학은 유익하기보다는 해로운 게 아닐까, 라고. 인문학의 위기가 무엇보다도 철학에 닥친다면, 자초한 몫이 분명히 있다고. 고전 연구 혹은 도덕적 형이상학이라는 보호막을 빙자해 현실의 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이기 위해 철학은 자신이 자란 동서양의 칸막이와 고전이라는 '전공 변호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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