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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에게 맑시즘을 가르친 李大釗
모택동에게 맑시즘을 가르친 李大釗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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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4) 서백파에서 공산혁명의 줄거리를 읽다

손문의 ‘국공합작’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이대소는 모택동의 스승이었다. 모택동보다 겨우 네 살 위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 이대소는 북경대 도서관 주임이었고 모택동은 사서 일을 보았다. 모택동의 첫 번째 장인 되는, 당시 북경대 교수였던 楊昌濟의 소개로 모택동은 도서관에 취직이 되었고,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 눈뜨기 시작했다.

▲북경대 도서관 ©
당시 북경대 총장은 蔡元培였다. 그는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에 따라 이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취하고 허용한다”고 선언할 정도로 대학의 자유분위기를 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뒤, 이대소는 국민당의 북경집행부가 성립되자 조직부장을 맡기도 했지만, 그의 최후는 처참했다. 동북 군벌 張作霖 군에 체포되어 체포된 지 22일 만인 1927년 4월 28일, 혹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비밀리에 처형되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 북경대에 가면 뜰 한 모퉁이에 그의 반신상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채원배가 북경대 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1917년 1월이었다. 1912년 정부의 교육총장을 맡았다가 이내 사임하고 독일로 건너갔던 그는 1916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채원배는 당대의 명망 높은 학자였고, 전형적인 전통 지식인이었다.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전통적인 부분을 함께 수용함으로써 포용적인 교육정신을 펼칠 수 있었고, 신해혁명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 대학 내의 新舊갈등을 나름대로 추슬러 나갈 수 있었다.

당시의 북경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몇 가지 단면을 소개해 본다. 교수들이 대학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학칙에 대학평의회를 둔 것이었다. 이것은 채원배의 명망과 영향력이 정부를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교수들이 7년간 근무하면 1년간 외국에 나가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 말로, 안식년이나 연구년 같은 제도가 채 총장 당시에 시행되었던 것이 재미있다.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이 취임 후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서백파라는 말을 앞에서 했다. 서백파는 하북성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땅은 척박하고 교통도 외진 곳이다. 그런 곳을 왜 호금도는 애써 방문했을까. 1998년 정월에 나도 서백파를 찾은 적이 있지만, 중국공산혁명의 줄거리를 알기 위해서는 참 잘 찾아왔다고 생각했었다.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 오지인데, 그 후 길을 잘 닦아놓아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많은 중국인들은, 평소 교육을 통해 서백파나 연안, 정강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답사를 한다거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의 여행담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서백파엔 崗南水庫라는 큰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입구에 다섯 사람의 거대한 동상이 보인다. 왼쪽부터 주은래, 유소기, 모택동, 주덕, 任弼時, 당시의 최고 영도들이 모두 두터운 솜옷을 입고 서 있었다.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이 다섯 개의 동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5인의 영도 가운데 유독 낯선 이름이 임필시이다. 임필시는 1950년 10월 25일,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28일 숨을 거두었다. 1904년 생, 등소평과 동갑인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건국 이듬해,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다른 개국공신들이 그 후에 격어야 했던 榮辱의 역사를 그는 맛보지 않아도 되었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가 다같이 1976년에 거의 천수를 누리며 숨을 거두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고 하겠다.

그 만큼 그는 대외적으로 덜 알려진 존재이지만,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출신으로,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의 정치부 주임과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주임 등을 맡았었다. 1945년 4월부터 연안에서 열렸던 일련의 고위회의에서 그는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와 함께, 5인으로 구성된 당 서기처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中共中央 비서장도 겸한 그는, 명실공히 연안, 서백파 시절의 중공당의 새로운 영도집단의 구성원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다섯 사람의 서기 중, 주덕이 59세로 최 연장자였고, 41세의 임필시가 가장 젊었다. 젊은 만큼 그는 역동적으로 활동했고 몸을 많이 상했다. 당뇨·고혈압 등에 시달렸다.

당시 5대 서기들은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분담된 역할이 있었다. 모택동은 사실상의 최고 군사통수권자로서 전국의 군사지휘를 맡았고, 주덕은 당의 감찰 사업, 유소기는 당내 사무와 적 통치구역 내의 사업, 임필시는 토지개혁을 책임졌다. 주은래는 군사방면에서 모택동과 협조하는 일을 맡았다.     

 
서백파는 중국 공산정권을 배태한 역사적인 고장이다. 거기서 북경 정부의 뼈대가 잡혔다. ‘해방전쟁’이라 일컫는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한 3대 戰役이 있다. 해방전쟁의 결정판이라 할 平津전역, 淮海전역, 遼瀋전역이다.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가 협조하여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휘부는 20 평방미터도 채 안 되는 모택동의 좁은 사무실이었다. 침실과 사무실이 붙어있는 이 방에서 4개월, 1백20일간에 걸쳐서 3대 전역을 승리로 마무리했던 곳이 서백파인 것이다.

서백파에서 모택동이 북경으로 향한 것이 1949년 3월 25일이었다. 이 역사적인 長途에서 모택동은 이대소를 생각했다. 모택동으로서는 떠난 지 30년 만에 북경을 찾는 길이었다. 단순한 방문길이 아니라,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넘겨서 ‘새 중국’의 건국을 선포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다. 북경의 성벽이 시야에 들어오자 모택동은 느닷없이 이대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30년이 지났군요. 나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인생의 쓴맛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운 좋게 북경에서 아주 훌륭하신 선생님 한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대소 동지였습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분은  혁명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이미 바쳤습니다.”

▲이대소 ©
자신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친 이대소를 생각하는 한편으로 모택동은, 명나라 말기에 농민혁명을 일으켜 북경의 紫禁城을 차지했으나 중국 천하를 얻는 데에는 실패한 李自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북성의 탁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북경으로 떠나는 날 아침, 모택동은 느닷없이 측근에게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자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바랍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崇禎帝가 자결을 하고, 권신들의 항복을 받으며 기세 좋게 입성했지만 결국 이자성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쫓겨 달아나고 만다. 황제 즉위식도 미처 치르지 못한 채 북경 입성 40일 만에,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던 이자성의 천하는 막을 내렸다.

명나라 말기, 서북 陝西지방의 大饑饉은 농민의 폭동을 촉발시켰고, 점차 확대된 농민폭동의 중심에 이자성이 있었다. 그는 闖王(틈왕)이라 자칭, 낙양과 서안을 점령하고 大順이란 국호도 만들었다. 명의 정예부대가 동북의 청나라 군대와 산해관에서 대치하고 있는 틈을 타서 이자성 부대는 1664년  순식간에 북경을 손 안에 넣을 수 있었지만, 대세는 자기 몫이 아니었다. 역사에 밝은 모택동은 이자성의 실패를 절대로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결의와 자신감을 갖고 서백파를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서백파는 현재 역사의 도시로 존재한다. 거기에도 물론 혁명기념관이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기념관에서 작은 문서 하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대견해 한 적이 있다. 제목이 ‘倡義實行火葬’이라 적힌 긴 두루마리 문서였다. 등소평과 이탈리아 여기자 파라치와의 대담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50년대 중공당의 영도들은, 죽고 나서 화장을 하고, 골회나 유해를 남기지 말며, 무덤을 만들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모택동이 앞장서서 서명을 한 그 문서가 서백파 기념관에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친필서명에서 “現其火葬的志願毛澤東”라고 적고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천안문 광장, 자금성 건너편에 모택동기념당이 있다. 아침이면 모택동의 유체가 지상으로 올라오고, 저녁이면 지하로 내려간다. 모택동 사후의 권력 승계를 위한 투쟁에서 강청 등 4인방은 자기네가 정통 승계 세력임을 내세우며 모택동의 유체보존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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