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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 공부로 이치 꿰뚫고 ‘곡학아세’ 거부하다
소학 공부로 이치 꿰뚫고 ‘곡학아세’ 거부하다
  • 유무수
  • 승인 2022.11.1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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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비판적 지식인 윤선도: 사상과 네트워크』 고영진 지음 | 푸른역사 | 256쪽

권력 비판하는 상소로 진언하다 귀양·처벌 받아
세 차례 거린 15년 유배생활, 음악·학문 수양해

비판적 지식인은 허위의식을 부정하고 권력과 부의 획득에 손해가 되더라도 진실을 외친다. 고영진 광주대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사 시간에 흔히 「어부사시사」를 지은 문인으로 언급됐던 고산 윤선도의 삶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을 조명한다. 안민(安民)을 소망했던 윤선도는 세 차례에 걸쳐 15년의 유배생활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1616년(광해군 8)은 영창대군 살해사건과 폐모론으로 조정이 어수선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첨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윤선도는 “설사 어진 자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더욱이 어질지 못한 자가 이렇게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하는 상소를 올려 당색으로는 북인과 가까운 부친과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이이첨을 단호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는 윤선도의 7년 귀양이었다. 

1652년(효종 3) 효종의 사부였던 윤선도는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동부승지를 거쳐 예조참의에 임명됐을 때 올린 상소에서는 붕당(朋黨)을 파할 것을 건의했다. 무리를 지어 사리를 도모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배척하고, 자기편에 빌붙는 자는 어떤 하자도 숨겨주며, 반대하는 자는 없는 흠집도 들춰내는 붕당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고 호소했다. 또한 윤선도는 공신세력이며 척신인 원두표가 추진하는 정책이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민심을 잃게 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과 문외출송의 처벌을 받았다.

 

윤선도(1587~1671) 의 초상화이다. 윤선도는 직언을 서슴지 않아 세 번에 걸쳐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미지=위키백과

1657년(효종 8) 왕비가 아픈 것을 계기로 다시 상경한 윤선도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된 후 공조참의에 임명됐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상소를 올린다. 기축옥사 때 죽은 정개청을 배향한 자산서원(1616년, 광해군 8년에 설립)을 1657년 송준길 등이 헐어버리고 위판을 불태워버린 것에 대해 잘못됐다고 직언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송준길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을 권시가 만류했지만 윤선도는 곡학아세를 거부했다. 상소의 맺음말에는 “신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신의 말은 오히려 우주 사이의 공론(公論)이 되어 오도(吾道)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신이 차라리 할 말을 다하고 죽을지언정 말을 하지 않아 폐하를 저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습니다”라는 호소가 적혀 있었다. 이 상소로 윤선도는 파직됐다.

윤선도의 유배생활에서 음악은 수양에 도움이 되었다. 윤선도는 젊을 때부터 익힌 거문고를 연주하며 중화(中和)의 기운을 기르고 분욕(忿慾)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양한 분야의 장서가였던 윤선도는 특히 『소학』을 귀하게 여기고 추천했다. “사람을 만들어내는 틀이 모두 여기에 있다.” 윤선도는 20세 즈음에 접한 소학을 통해 경전들의 이치를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가까이 두고 반복해서 읽었다. 유배지에서 윤선도를 힘들게 한 것은 혹독한 기후였다. 겨울에는 얼음 창고처럼 추웠다. 가장 호의호식했을 왕들의 평균 수명이 46세였던 시대에 귀양생활로 고생했던 윤선도는 85세까지 살았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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