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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벼운 책읽기?
한없이 가벼운 책읽기?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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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7:46:38

책 안 읽는 우리 사회에 대한 각성과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책 읽는 사회’를 향한 독서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학생들은 과연 책을 얼마나 읽을까. 6개 대학의 상반기 도서대출 현황을 조사해보았다.

지금 대학 도서관은 행복한 가상공간과 남루한 현실이 부딪는 전장이다. 몇 갑자의 내공을 지닌 무협청년들을 설레게 하던 이름들-김용, 고룡, 와룡생 등의 뒤를 이어 검궁인, 사마달, 야설록 등 토종 ‘무협 키드’들이 창작무협의 시대를 이어나가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 도서관의 대출순위는 무협지의 차지였다. 그러나 지금 대학도서관은 무협의 옷자락 대신 마법의 칼과 방패가 번뜩인다.

부산대의 경우 2001년 상반기 최다 대출 도서 10권 중 ‘묵향’, ‘드래곤 라자’, ‘영웅문’, ‘데프콘’, ‘비상하는 매’ 등 5권이 판타지이거나 판타지와 무협을 섞은‘무협판타지’이다. 충남대의 경우 ‘데프콘’, ‘신비소설 무’, ‘다크문’, ‘퇴마록’, ‘카르세아린’ 등 8권이 무협과 판타지이고, 전북대의 경우 최다 대출도서 10권 중 나관중의 ‘삼국지’를 빼고 나머지 9권이 판타지이다.

일부 매니아들이 통신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즐기는 소수 취향의 ‘컬트’이던 판타지 문학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 당당히 대학 도서관에 입성한 것이다.

도서관에 새겨진 환상과 마법의 홀로그램

우찬제 서강대 교수(국문)는 이렇듯 판타지 문학이 대학 도서관을 휩쓰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판타지 문학의 기본적인 속성인 환상, 꿈, 신화 등, 문학의 원형이라고 여겨지던 신비로운 세계에 젊은이들이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제도속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발목을 잡는 도덕이나 의무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들에게 판타지는 정신의 해방구이자, 이상과 괴리된 현실을 잊게 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신세계’로 여겨집니다.”

두 번째 이유는, 대학생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자극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컴퓨터의 등장이 맞물린다.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사이버 세상과의 소통에 익숙한 80년대 생들이, 전통적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장구한 호흡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

다양한 취향 가운데 하나로 판타지 문학에 빠져드는 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지만, 번역이나 창작 수준에서 독서인구의 수준을 끌어올려 줄만큼 괜찮은 작품들이 없다는 사실이 판타지의 한계라는 것 또한 우교수의 지적이다.

판타지와 함께, 필독서처럼 읽히던 사회과학과 철학이 추락한 자리를 꿰차고 올라온 것은 읽기 쉽고 재미도 있는 대중소설들이다. 서울대의 경우 대출 순위 10위안에 무협지나 판타지 계통은 한 권도 없지만, 인문교양 에세이인 ‘로마인 이야기’를 빼고, ‘아리랑’, ‘좀머씨 이야기’, ‘장미의 이름’, ‘상실의 시대’ 등 소설류가 대부분이다. 비교적 독서경향이 다양한 고려대의 경우 ‘상도’,‘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국화꽃 향기’,‘텔미 유어 드림’등 대중소설과 판타지가 7권이고,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노자와 21세기’등 일반교양서는 3권이다. 한양대의 경우에도 소설 아닌 ‘먼 나라 이웃나라’, ‘로마인 이야기’정도이다.

한정된 장르 빈약한 독서량

출판저널 편집자문위원인 김정란 상지대 교수(불문)는 대학생들의 폭 좁은 독서경향의 근본적 원인으로 ‘문화철학의 부재’를 꼽고 있다. “비단 대학생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가벼운 ‘꺼리’로서의 읽기를 소비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문화현상이라고 인정하고 마냥 받아들이고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한가한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문화정책을 만들어낸다는 정부와 관련부처가 이토록 ‘방기’해도 되는 것일까요.”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된 문학공부와 독서훈련을 해본 적 없는 이들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갑자기 폭넓고 다양한 독서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 한국의 도서관에는 책이 없고, 책이 없으니 책 읽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설사 책이 있어도 제대로 책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구태여 머리 쓰지 않고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만 집어든다. 우리 대학문화의 현주소인 셈이다.

<6개 대학 도서관 대출순위>고려대

1. 상도(최인호)
2. 가즈나이트(이경영)
3. 검마전(하주완)
4.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롤링)
5 국화꽃 향기(김하인)
6. 흑기사(김근우)
7.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현각)
8. 텔미 유어 드림(시드니 셀던)
9.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10. 노자와 21세기(김용옥)

부산대
1. 묵향(전동조)
2. 드래곤라자(이영도)
3. 영웅문(김용)
4. 데프콘(김경진)
5. 로마인이야기(시오노 나나미)
6. 삼국지(이문열)
7. 태백산맥(조정래)
8. 토지(박경리)
9. 아리랑(조정래)
10. 비상하는 매(홍정훈)

서울대
1. 로마인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2. 아리랑(조정래)
3. 좀머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4. 로마인이야기
5. 장미의 이름 상(움베르토 에코)
6. 장미의 이름 하(움베르토 에코)
7. 로마인이야기
8.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끼)
9. 태엽감는 새(무라카미 하루끼)
10.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
* '로마인 이야기' 가 1위, 4위, 7위에 동시에 있는 이유는 모두 아홉권인 이 책이 컴퓨터 처리상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서울대 도서관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위에 있는 것은 1권, 4위는 2권, 7위는 3권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되겠지요.

전북대

1. 묵향(전동조)
2. 삼국지(나관중)
3. 성검전설(홍성호)
4. 드래곤 라자(이영도)
5. 다크문(윤현승)
6. 퇴마록(이우혁)
7. 사이케델리아(이상규)
8. 카르세아린(임경배)
9. 탐그루(김상현)
10. 데로드 앤 데블랑(이상혁)

충남대
1. 데프콘(김경진)
2. 신비소설 무(문성실)
3. 다크문(윤현승)
4. 퇴마록(이우혁)
5. 카르세아린(임경배)
6. 동천(조재윤)
7. 검은숲의 은자(민소영)
8. 국화꽃 향기(김하인)
9. 대륙의 별(김용)
10. 하얀 로냐프강(이상균)

한양대
1. 상실의 시대
2. 아리랑(조정래)
3. 묵향(전동조)
4.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5. 텔미 유어 드림 상(시드니 셀던)
6.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미치 앨봄)
7. 로마인 이야기 1(시오노 나나미)
8. 텔미유어 드림 하(시드니 셀던)
9. 퇴마록(이우혁)
10. 아리랑 2(조정래)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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