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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진짜 주인은 民衆이 아닌 ‘부르주아’
프랑스 혁명의 진짜 주인은 民衆이 아닌 ‘부르주아’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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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_‘근대 프랑스 민중공연문화의 문명화 과정’

프랑스 혁명시기 문화사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주로 ‘책과 독서의 역사’를 통해 사회변화(변혁)를 추적하거나 또는 공공축제연구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런 와중, ‘프랑스사 연구’지 최근호(14집)에서 육영수 중앙대 교수(서양사상사)가 ‘근대 프랑스 민중공연문화의 ‘문명화 과정’: 1750~1799’라는 논문을 통해 “기존 연구들은 민중공연문화라는 이슈를 소홀히 취급해왔다”라며, ‘공연문화’를 주요 변수로 삼아 프랑스문화사를 살펴볼 것을 주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육 교수는 서두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민중공연문화계의 사례분석을 통해 18세기 정치문화사를 재인식하자는 것으로, 이를 통해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정치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 본다. 둘째, 엘리아스가 주창했던 ‘문명화과정 테제’(‘얻은 것은 세련된 양식이며 잃은 것은 자연스런 삶’)를 응용해보겠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민중문화와 엘리트문화 사이의 교류에서 문명화과정 테제 적용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문제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구체제의 엘리트와 민중문화, 프랑스혁명과 민중공연문화의 문명화를 차례로 살펴본다. 논문에 따르면, 구체제에서는 문화계가 철저히 이분화되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궁중공연계는 ‘왕실음악아카데미’, ‘코미디-프랑세즈’, ‘코미디-이탈리안느’ 등 3개의 독점체제로 분할되어 있었다. 그 외 마이너리그 문화패거리들은 외곽에서 여흥을 누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이런 지형도에 변화가 생긴다.

1760년대 후반부터 민중악극단들이 왕립극단들의 공연권 일부를 구입할 정도로 약진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엘리트극단이 민중악극단의 에너지를 수용하고 이에 따라 상층과 하층문화의 경계선이 모호해졌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취향의 부르주아화’를 촉진함으로써 민중문화의 즉흥성과 자율성도 상실되”는 결과를 야기했으며, 민중의 “천박한” 문화적 취향은 억압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스혁명의 발발은 민중문화에 봄날을 가져왔을까. 유감스럽게도 문화혁명 바람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 논문에 따르면 “혁명의 발발은 고급문화의 종식도 아니었고, 진정한 문화의 출발점도 아니”었다는 것. 그보다는 오히려 자코뱅정부의 공포정치 출현과 함께 민중문화의 ‘문명화 과정’이 가속화되었는데, 당근과 채찍을 동원함으로써 “공연예술이 전문화·관료화”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아가 테르미도르 반동정부 시기에는 “민중문화의 부르지아지화의 완결판”이라 할만한 상태로 귀결되었다.   

육 교수는 1792년 만들어진 파리국민방위대 무료음악학교, 1793년 출범한 국립음악원, 1794년 3월 검열제도의 부활, 1793~94년 사이 등장했던 애국주의의 선서장면 등을 사례로 들면서 “민중문화의 문명화는 역설적으로 권위주의적 인물에게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프랑스혁명을 종결시킬 수 있는 빌미와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프랑스혁명은 ‘성공한 부르주아적 문화혁명’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결국 세 가지 점에서 프랑스혁명을 재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문화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프랑스혁명은 ‘단절’이 아닌 ‘연속’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 둘째, 문명화과정은 부르주아지의 음모라기보다는 시민적 교양문화에 동참하려는 민중의 자발적 동화과정으로 봐야한다는 것, 셋째, 프랑스혁명이야말로 저항적인 민중문화 탄생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는 기존 관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문제제기와 분석은 기존에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이뤄졌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나 책과 독서를 통한 민중세력의 변화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문이 ‘역사적 스케치’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료들을 통해 가설을 보다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역사학은 역시 ‘사료’를 가지고 입증해야 하는데, 아직은 논문이 문제제기 단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화사가들에게 ‘공연’이라는 개념으로 문화사를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가 논쟁이 되고 있듯, 육교수의 이러한 분석은 향후 학계에서 토론을 거쳐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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