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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朝鮮적 기원, 그 다양한 個性의 현장
글쓰기의 朝鮮적 기원, 그 다양한 個性의 현장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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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_ 조선후기의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

한문학 전공자들이 ‘편지’에 주목하고 있다. 김풍기, 심경호, 안대회 같은 학자들에 의해 조선 후기 ‘小品’ 류가 문학적 표현의 주요한 검토대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이지만, 그 가운데 ‘편지’가 유달리 주목을 받는 것은 최근인 것 같다.

한문학계의 관심은 편지를 통해 사상가들의 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적인 삶, 공적인 삶을 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일종의 문서적 알리바이라는 데 닿아 있다. 이는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의 ‘한국문화연구’ 9호에 실린 ‘순암의 편지에 나타난 새로운 글쓰기 연구’(허순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호 혹은 성호 문인들과 편지로 사상적 교류를 즐겨 했던 순암 안정복의 편지는 “그의 삶 속의 열정과 욕심 등을 드러내주는 작가이해의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편지는 의례적인 격식을 갖추는 글쓰기가 아니라 “바로 본론에 들어가 궁금증을 밝히는” 글쓰기였으며,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는 직설적 글쓰기, 또한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존하는 글쓰기였다는 게 허순우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당대 편지로 희문과 기문을 주고받던 신흥사대부들과 달리 현대적 표현으로 하자면 ‘실학적 지식인’의 글쓰기 문화의 일단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문학계는 근대적 자아의 독특한 표출형태를 편지 속에서 찾아내려는 다소 관념적 시도도 하고 있다. 같은 학술지에 실린 ‘去勢된 언어와 私的 전언’(박무영)이 그런 경향에 포섭된다. 박무영은 유배당하여 공적 언어를 거세당한 이광사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오히려 “일상의 디테일한 감성을 문학의 전면에 부각시키는 근대적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엄격한 한시의 율격과 압운 등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지루하도록 길게 묘사하는 ‘多言’, 험벽한 글자와 고사의 사용을 유배시절 이광사 시의 주요 특징으로 뽑아내는데 이는 당시의 문학적 지배언어를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내밀한 의식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시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견해다.

이광사의 유배시가 漢文의 문학적 코드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면, 한글 창제 이후 조선 중후반을 거치며 한문의 문장적 구조에 대한 해체 작업은 또 따로 이뤄지고 있었다. ‘국문 글쓰기의 문장모델 형성과정 연구’(배수찬)라는 글은 經書와 聖書의 언해가 한문과 다른 국문글쓰기의 형태를 어떻게 이뤄나갔는가를 살피고 있다. 논문 저자는 한글이 창제되었을 당시 자모는 있었지만 그 자모를 어떻게 활용하여 우리말의 어순에 맞출 것인지는 미처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경서·성서언해가 이런 작업을 담당했다고 예시하고 있다. 저자는 경서에서는 본격적인 국문글쓰기가 모색되지 못하고 “장과 구로 짜여진 틀에 갇혀 현토달기”에 그친 반면, 성서번역은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개화한 선비 이수정(1842~1886)이 번역한 ‘신약마가전 복음서언해’는 “한문의 해체라는 근대 어문생활사의 핵심적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이 번역성경이 경서언해와 달랐던 점은 훨씬 더 실생활에서 쓰는 구어체 문장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길준의 ‘서유견문’보다 훨씬 더 한자어의 비율을 낮추고 일상어법과 가까워 오히려 서구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관념어를 많이 사용했던 ‘서유견문’보다 훨씬 더 근대적 문장 모델의 성립에 기여하는 바가 많았다는 것이다.

문장·글쓰기·언문일치에 대한 한문학계의 이러한 관심이 그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글쓰기의 형식과 문체 그것이 사상 및 삶과 갖는 관계를 규명하게 될 것인지 주목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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