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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텔레비전 토론, 어디까지 왔나
[문화비평]텔레비전 토론, 어디까지 왔나
  • 전규찬 강원대
  • 승인 2001.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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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5:59:08
전규찬 / 강원대·언론학

공개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행위가 곧 의심의 대상인 적이 있었다. 침묵을 강요받은 우리에게는 정해진 공식 발화자의 말을 새겨듣는 역할만이 부여되었다. 말의 철저한 죽임 상태. 말의 실종은 자기 의식을 내부로 구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어증과 자폐증. 그런 역사에 비춰볼 때 최근 주변에서 감지되는 말의 풍요는 권위 체제가 물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말의 양으로 따져보자면, 우리 사회는 차라리 선진 수준에 가까울 것이다. 말이 숙성된 표현 또는 진지한 대화 매개의 수단이 아닌, 무의미한 소음 생산의 기계화한 조짐마저 보인다. 자본에 의한 말의 식민화, 말의 소외. 과거 말의 부재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말의 과잉이 부담스럽다. 공식적, 사적인 것이 뒤섞인 채 뜻의 진위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말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사들은 다투어 토론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KBS 2TV ‘시사난타 세상보기’, SBS의 ‘공방토론’이 추가되면서 방송은 토론 프로그램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섰다. MBC ‘100분 토론’, KBS ‘심야토론’, EBS의 유사 프로그램과 함께 뉴스라는 일방 공식적 형식, 그리고 토크쇼 등 사적 잡담의 흐름 사이에 토론이라는 공(개)적 대화의 틈을 냈다. 사실 토론 프로그램은 남 이야기에 관심 많은 기성 세대와 언어 해방을 꿈꾼 ‘386세대’, 그리고 현 농담 문화를 주도하는 ‘신세대’ 모두에게 어필하는 포맷이다. 시사를 따라 잡아야 한다는 시민 정치 부담, 지적 담화에 끼고픈 지식 계급 욕망, 그리고 말싸움의 승패를 엿보고 험담하면서 느끼는 우리의 즐거움을 접합시킨 형식이기도 하다.
가벼움으로 흐르는 다중의 관심을 주요 사회적 의제로 이끌어 묶는 토론 프로그램의 의미는 매우 크다. 공식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틈, 위로부터의 일방 언설과 아래로부터의 허무 농담 사이에 난 대화·교통의 터. 그러나 지금의 토론 프로그램은 시민 사회 내 활달하고 개방된 담화를 이끌기에 몇 가지 약점을 드러낸다. 왜 하필 심야 11시대인가. 이 늦은 시간에 장시간 토론을 정신차리고 따라잡기는 매우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다. 다음날 일해야 하는 성인 시청자들을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젠 끝난 김용옥 강의에 비해 훨씬 많은 이들과 연관된 사안 논의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합당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일방 교육이 쌍방 토론보다 우월하다?
시기에 맞지 않거나 전문성이 과한 주제, 거꾸로 추상성이 높아 논쟁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좌담식 주제는 토론을 따분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이러한 내용으로는 늦은 시간 ‘깨어있는’ 시청자들도 붙들 수 없다. 지리멸렬한 ‘그들만의 리그’는 오히려 화만 돋군다. 주제에 관해 확실히 차이나는 입장을 갖춘 토론자들이 배치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인터넷을 통해 전개되는 시청자 불만의 대부분이 자격 없는 출연자에 집중된다. 출연자중 한 명이라도 나보다 아는 게 별반 없거나, 설득·주장·토론에 임할 일관된 입장을 갖추지 못했을 때 프로그램은 즉시 유감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된다. 배신감 느낀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을 웃음거리, 코미디로 비하시킨다. 멀쩡한 대학의, 근엄하게 폼잡은 교수도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럼 제대로 ‘똑똑한’ 지식 계급에 더욱 기대면 되지 않겠냐는 발상은 문제의 해결책이 못된다. 디제이 정권의 개혁 성과를 토론하면서 패널을 대학 교수로 채우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끼리의 탁상공론에 그칠 것임을 자백하는 얄팍한 선택이다. 농민, 노동자, 학생, 주부 등 다양한 집단 참여를 가로막는 권위주의적 발상이며, 지식 계급이 사회 구성원의 삶 전체를 대표해 이야기하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모독적이다. 지식인 담론 독점은 양적 확대된 토론 프로그램의 경직 제도화, 공적 담론의 폐쇄 수로화만 가져온다. 더 많은 토론 프로그램을 편성한다고 TV가 시민 공론장 형성에 자동 보탬 주는 것은 아니다. 말 많음이 사고 깊음을, 행동 빠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소수에 독점된 발언과 토론의 기회를 시민 다수에게 돌려줄 때 텔레비전은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사르트르는 말이 표면에 살랑대는 미풍이 아닌, 사회 현실을 구성·생산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TV 토론 프로그램을 시비하는 것도 말이 사회 행동과 깊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발언은 개인 의식을 드러내고, 그 ‘드러냄’은 현실 문제와 그 해결을 위한 행동 방향까지 지정한다. 토론 프로그램이 사회 공적 의미를 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또한 우리가 현 상태에 유감을 표하면서 좀더 깊은 성숙을 요청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낯설어 공허하지 않으면서 너무 익숙해 동어 반복적이지 않은 중간 수준의 진지한 일반 담론의 틈새를 만드는 일이 숙제로 남는다. 억지 소외시킨 ‘그들’의 자리 마련을 위해 독식해온 말의 성찬에서 물러나는 것이 ‘우리’ 몫이 아닐까. ‘말꾼’들이 침묵하면 오늘밤 이야기 마당은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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