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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글 지켜낸 ‘근대잡지 창간호’를 만나다…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
우리 말·글 지켜낸 ‘근대잡지 창간호’를 만나다…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
  • 김재호
  • 승인 2022.11.0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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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학연문화사 | 528쪽) 쓴 김기태 세명대 교수

“작가 이태준이 주재하는 <문장>과 평론가 최재서가 발행하는 <인문평론>의 두 문예지는 일제의 지시를 거부하고 1941년 4월 자진 종간을 선언했다. 이후 속간되어 변절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종간 당시만큼은 우리 말과 글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

“<장미촌>은 우리 근대문학 최초의 시전문지라는 점에서 이후 문예지 창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근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를 출간한 김기태 세명대 교수(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는 지난 21일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장미촌>은 1921년 5월 창간됐다. 

 

김기태 세명대 교수(59세‧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서 「뉴미디어의 기술진전 과 저작권 보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소셜미디어 시대에 꼭 알아야 할 저작권』(2020) 등이 있다. 사진=김준영

근대잡지들은 지속적으로 발간이 됐을까. 김 교수는 “근대잡지 중 상대적으로 오래 발간된 잡지로는 <조광>”이라며 “이 잡지는 1935년 정치·경제·시사·문예·철학·종교 등 각 부문을 망라하는 내용을 담아 창간된 월간 종합잡지”라고 설명했다. <조광>은 1930년대 중반에 창간된 시사종합지들 중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발행을 이어나갔던 유일한 시사종합지다. 그는 “<조광>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발행했는데, 1945년 6월까지 통권 113호가 발간됐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조선일보>의 자매지의 하나로서 창간된 <조광>의 위상이 보다 강화되었던 때는 <조선일보>가 폐간되었던 때부터였다”라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일보>가 1940년 8월 10일부로 폐간되면서 <조선일보>는 ‘조광사(朝光社)’로 체제를 전면 전환하게 되었고, 회사의 모든 역량은 <조광>에 집중되었다”라고 밝혔다. 

“근대잡지들은 상업지로서의 성공보다는 국민정신 계몽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한 지사적 매체였다.”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 서문에서 김 교수는 근대잡지들의 의미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근대시기에 명멸해 간 우리 근대잡지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낸 공로와 함께 우리 민족정신을 면면히 이어준 매우 중요한 매체”라고 밝혔다.

근대잡지 중에서 <동양지광>, <총동원>, <태양>, <신시대>, <국민문학>, <대동아> 등은 친일의 성격을 보였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친일 잡지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처음부터 일제에 동조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라면서 “아마도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광복에 대한 희망의 끈을 점점 놓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답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일제의 패망을 상상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일제강점기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친일 행보가 잦아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라며 “하지만 끝까지 고초를 견디면서 일제에 맞선 분들도 많았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현존하고 진본 확인 가능한 100종 선정

집필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근대잡지 창간호가 발행될 당시의 표기법(국한문 혼용)이 매우 난해해서 창간사 및 간기면을 해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라며 “이미 고증된 것들의 경우에는 관련문헌과 일일이 대조해서 바로잡는 과정을 거쳤는데, 그 부분이 가장 어려웠고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라고 답했다. 

연구 대상은 근대잡지 창간호 100종이다. 동경 유학생 중심의 친목·계몽 잡지인 <친목회회보>(1896년 2월 15일 창간호 발행)부터 현암사 창업주 조상원 선생이 발행한 대중 종합잡지인 <건국공론>(1945년 12월 25일 창간)까지 다뤘다. 그 선정 기준이 궁금하다. 김 교수는 “우선 창간호가 현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중요했다”라며 “진본 혹은 영인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했으며, 당대인의 반향과 더불어 후대의 관련 분야에 미친 영향도 고려했다”라고 설명했다. 

근대잡지의 창간호만큼이나 마지막호도 의미가 있다. 김 교수는 “1939년, 작가 이태준이 주재하는 <문장>과 평론가 최재서가 발행하는 <인문평론>의 두 문예지가 창간됐다”라며 “두 잡지는 일제의 ‘조선어를 반분(半分)하고 일어를 반분하여 황도(皇道) 정신에 적극 협력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1941년 4월 자진 종간을 선언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후 속간되어 변절의 길을 가기도 하지만 종간 당시만큼은 우리 말과 글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덧붙였다. 

 

세상에 ‘처음’ 나온 책 모아 처음책방을 열었다

김 교수는 충북 제천 세명대 인근에 직접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인 ‘처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세상에 ‘처음’ 나온 책들을 모아 놓은 곳이어서 ‘처음책방’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김 교수는 30년 이상 이어온 창간호·초판본 수집이 올해 3월에 책방을 여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인 취미로 시작된 일이 30년 이상 지속되다 보니 여러 군데 보관했던 창간호와 초판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쌓이게 되어 부득이하게 한데 모으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아예 책방을 열었다”라고 답했다. 처음책방에는 나이 든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만, 젊은 이들도 부모님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방문한다. 그런데 해당 책이나 잡지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고 한다. 김 교수는 “모든 소장자료를 디지털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밝혔다. 

 

김기태 교수는 충북 제천에 있는 세명대 부근에서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인 ‘처음책방’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올해 3월 문을 열었다. 취미로 시작한 창간호와 초판본 모음이 30년 이상 지속돼 ‘처음책방’이 탄생했다. 사진=김준영

 

학문 분야별 역사 다루는 기초학문 위기

“기초학문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토대 마련에 모든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를 하면서 대학의 기초학문 위기를 우려했다. 그는 “학문 분야별 역사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사라지고 있어 염려가 크다”라며 “학문적 역사가 오롯이 정리되고 관련 자료가 집적되어야만 후대에도 전통학문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당분간 자료 정리에만 몰두할 작정이다. 그는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 이후의 연구에 대해 “소장하고 있는 단행본 및 정기간행물 자료들을 정리해서 시대별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거시적 연구와 함께 특정자료를 분석하는 미시적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우리가 직접 만든 최초의 잡지

『한국 근대잡지 창간호 연구』는 ‘제1장 서론’에서 근대잡지가 나타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 근대 출판이 나타난 요인은 신식 인쇄술과 출판의 도입, 근대 신문의 대두와 새로운 문필인의 탄생, 신교육의 보급, 국문 전용과 언문일치 문장의 사용, 새로운 독자층의 대두 등이다. 

책에 따르면, 우리 땅에서 편집과 인쇄가 이루어진 최초의 영어잡지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였다. 1892년 1월에 창간된 이 영어잡지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행했다. 1895년 7월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대조선일본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한 후 다음해 2월 <친목회회보>를 창간했다. 발행 장소는 일본 동경이라서 우리의 최초 잡지로 보기 힘들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는 독립협회에서 1896년 11월 30일 월 2회 발행을 목표로 선보였다. 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우리가 직접 우리 땅에서 발행한 최초의 잡지는 <대조선독립협회회보>였다. 이 잡지는 독립협회가 1896년 11월 30일 월 2회 발행을 목표로 선보였다. <독립신문>이 1896년 4월 7일 창간됐고, 7개월 후에 <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발행됐다. 

김기태 교수는 “초창기 근대잡지들의 발행주체는 크게 보아 교회 등 종교 계통을 비롯하여 유학생 단체, 단체 또는 학회, 독립된 잡지사 등이었다”라며 “근대잡지 형성기에는 상업성을 초월하여 민족사상 함양에 주력함으로써 본격적인 종합잡지와 전문잡지들이 나타날 수 있는 토대를 닦아주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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