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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시론_우리 학문과 철학
창간시론_우리 학문과 철학
  • 이태수 서울대
  • 승인 2006.04.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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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질 수 있을까?”

서양에서 학문사의 발달은 분명히 다양한 전문분과의 다기화, 다양화가 진행되어온 과정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통합학문 노릇을 하던 철학으로부터 제반 학문 분야가 분화되어 나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경우 철학이란 말이 좋아 통합학문이지 실상은 미분화상태의 두루뭉수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얼핏 보게 되면 꽁트류의 고전적인 실증주의 사관에 따라 한때 인류의 지성이 종교로부터 해방되는 단계에서 철학이 탄생했지만 그 뒤의 진화 단계에서는 과학이 출현하여 철학의 역할을 대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지성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진화의 궤적을 그리지는 않는다. 학문의 다기화, 다양화와 동시에 각 분야의 방법론이 과학적으로 좀 더 정치해져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철학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 이전에 종교까지도 그 때문에 소멸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소멸은커녕 전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고급 종교의 경우는 철학과 과학의 출현을 통해 소멸되거나 약화되기보다는 스스로의 내용을 좀 더 고급화 하는 진화의 계기로 삼은 것이 오히려 진상인 것이다.

예컨대 갈릴레오를 법정에 세웠던 그 옛날의 교회는 지구의 운동 방식이 신앙의 문제와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오늘날 웬만한 지성을 갖춘 기독교인 중에 누가 하느님이 지구가 움직이게끔 우주의 질서를 꾸몄다고 해서 신앙을 거두어야겠다는 생각하겠는가. 그처럼 황당한 과거의 오해에서 벗어난 만큼은-적어도 그만큼은-오늘날의 기독교는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한 것이 틀림없다.

철학의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과거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분야가 분가하여 나간 뒤 철학이 바로 철거해야 할 빈집이 되고 만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좀 더 깊이 있고 정통적인 철학의 과제에 집중할 수 있어서 내용적으로는 더욱 세련된 학문으로 발전할 계기를 얻은 것이 진상이다. 과학이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처리해야 할 과제를 철학이 자신의 고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의 소치로서 제대로 된 과제 처리노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에 철학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인식되었던 과제가 과학적 처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철학의 발전을 위해 차라리 바람직한 일이다. 종교의 본질이 과학적 탐구의 결과에 따라 무시로 훼손도 되고 강화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도 과학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과제를 담당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하지 않는다.

철학은 여타의 모든 분과 학문의 탐구 영역과 병렬된 또 다른 독자적 탐구 영역을 확보하여 그에 관한 지식 정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성립한 학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학문 활동에 대한 메타 수준의 반성을 주 임무로 하여 각 분과 학문의 지식 산출과정의 논리와 정당성을 문제 삼고 또 산출된 지식이 인간 삶의 전체 맥락과 연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사색한다. 그래서 비록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하는 지식체계로 군림할 수는 없지만 분과 학문과는 또 다른 수준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삶과 지식의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하는 것이 곧 철학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달리 여러 분과 학문은 각기 영역을 나누어 그 영역 내에서 학문적 문제로 제기된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검증 또는 반증의 절차를 수행하며 진리에 점차적으로 접근해가는 시도를 한다. 이 일에 종사하는 분과학문의 전문인은 자신의 일을 하는 동안은 일단 다른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포함해 지식 세계 전체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다. 그와 같은 전문인으로서의 에토스는 분업 체제의 효과를 얻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거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이 전문분야 별로 쪼개져 있어 서로 아무 연관이 없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인 한, 인간 지성은 전체성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다. 만일 지식인이란 지식인은 모두 다 각기 전문 분야 안에서만 머물러 든다면 학문적 지식이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 기여하는 방식도 단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학문적 지식이 아무리 쌓여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어디로 끌어가야 할지 모를 것이다. 요컨대 철학이 빠진 학문 활동 즉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포기한 학문 활동은 기실 맹목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간의 지성의 요구를 외면하는 비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모름지기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혹시 우리나라의 학문 활동이 바로 그런 맹목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지는 심각히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 관한 한 우리 학문이 결코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고 보는데 그 까닭은 우리 학문의 기구한 역사에서 비롯한 사정에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유구한 학문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전통의 단절을 겪게 되고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야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전통에서 유래한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여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개시했다. 우리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시점은 대체로 서양의 학문사에서는 분과 학문의 다기화, 다양화가 상당히 진행된 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학문의 분화 과정에 대한 역사의 기억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분과 학문의 모태였던 철학은 이미 소멸된 것처럼 여겨도 상관이 없었고 오직 자신이 종사하는 전문 학문 분야에서 급하게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학계는 겉으로는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강조해 마지않는 학제간 협업도 실제로는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 인접 학문 간의 협업도 쉽지 않은데, 성격이 크게 다른 여러 문제가 교차되는 인간 삶의 현장에 처할 때에는 당황해 하기 일쑤다. 가령 생명과학의 문제가 윤리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의 인간 삶이지만 사고가 나기 전에는 미리 이 점을 심각하게 다루려 들지 않는다. 그런 예는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분과 학문의 울타리 넘어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미리 학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까지는 한참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인다.

우리 학계에 철학이라는 간판을 단 분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전체성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려는 철학이 우리 학계에서는 마치 여러 다른 학문 분야와 별도로 독립된 분야인 양 따로 성채 안에 거주하고 있어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서양 철학이 현실 적합성을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 유학은 그런 점에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연구, 교육되는 철학과는 달리 모든 학문 활동의 전체적인 이념적 통제 장치로서 작용을 했기 때문에 강력한 현실 적합성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지식을 하나로 꿰서 인간 삶 전체 즉 생활 세계 전반에 연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학이 그런 힘을 과도하게 발휘한 때문에 오히려 학문의 성장에 특히 과학적 방법의 개발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유학이 확보한 현실 적합성은 마치 국민의 삶을 마구 재단하려 드는 독재정권의 강압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약자들이 느끼는 현실적 힘과도 같은 것에 유사한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숨 막히는 학문 세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동경할 수는 없다. 철학이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해 가지고 있는 양 행세를 하면, 그래서 몇 가지 철학적 원리에서 분과학문이 담당해야 할 지식의 내용까지 연역적인 하향통로를 통해 모두 직접 제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행세를 하면 그것은 명백히 학문사의 후퇴를 뜻할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교리를 근거로 지구의 운동까지 이러 저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요하는 중세로 후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전체의 그림을 함부로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분과 학문의 지식들 간의 상호 연관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며 그것이 전체 지식 세계 내에서 또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메김 하려는 시도를 하는 철학의 필요가 절감되는 때다. 그런 철학은 분과학문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의 성과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런 철학이 아직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 그것이 우리 학문 세계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좀 낡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가끔 학문 활동에 있어서 주체성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학문이 주체성을 확보해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결국 서구의 하청 학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자가 비판의 목소리도 자주 듣게 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창조적 사유도 이런 비판과 깊이 관련된 주제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서양 학문이 만들어 낸 문제들 즉 그들의 학문사에 역사적 배경을 둔 문제의 한 자락을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과제인 양 붙잡고 씨름을 해왔다. 정말 창조적 사유가 빛을 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어진 문제의 답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세계에 던질 수 있을 때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가 바로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때다. 철학적인 노력이 없이 그럴 때가 오기를 기대할 수는 있을까. 그 대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이태수 / 서울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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