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곰곰 생각해보면 도대체 희소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자기절제의 미학을 주장하거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같은 선문답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희소하다는 것은 결국 귀하다는 것이고 이건 순전히 사람이 그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건데, 그러면 그 욕망이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맘속에 있는 고정불변의 것이냐라는 물음이다. 이미 잘 알다시피,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창출되며 때로는 주입되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내 또래의 아이들은 장래희망을 묻는 말에 과학자가 되어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 정확히 말해 부모로부터 주입된 욕망을 말했던가. 심지어 기침하며 물 마셔가며 배워야 간신히 흡연의 참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시장경제에서,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욕망을 창출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대표적인 주체는 바로 자본이다. 자본주의사회를 가장 능동적으로 기획하고 헤쳐 나가는 주체 또한 자본이다. 그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창출되는 우리의 욕망들, 그것이 어디까지가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본질적인 욕망이고 어디서부터는 인위적으로 창출된 욕망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핸드폰인가, 아니면 그 핸드폰을 사용하는 요염한 자태의 모델인가.
지구 전체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뒤덮이고 나면 더 이상 자본주의로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사라지므로, 결국 시장이 포화되어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라 생각한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경제학자인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로 우리들 인간의 마음속에 무궁무진한 처녀지가 놓여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제까지 검정 고무신으로 만족하던 아이들이 오늘은 나이키 운동화가 없어서 자살을 꿈꾸고, 무전기만한 크기의 검정색 핸드폰으로도 “이동하며 전화할 수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던 내가 최신형 벨소리의 날렵한 단말기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마찬가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다소 낭만적으로까지 들리는 공산주의의 모토가 갖는 맹점도 여기에 있다. 구 소련사회에서 물질적 실체가 있는 생산만을 “생산적”이라고 보았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지만, 그 체제는 결국 1980년대 이후 인민의 “창출된 욕망” 앞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이념이 아니라 록음악을 듣고 블루진을 입고 싶어 하는 “비생산적” 열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경제학교과서의 출발점이 이럴진대, 하물며 그 어떤 문제를 들이대도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하나의 답안만을 제시하는 경제학교과서나 경제학자들의 주장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요컨대 하나의 사이즈로 어린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다 입을 수 있다(one size fits all)는 주장을 접할 때면 일단 의심해보도록 하자. 진리는 역사성, 그리고 사회성을 갖는 것이므로!
류동민 / 충남대·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