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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재자, 민중의 벗이자 전쟁광
위대한 독재자, 민중의 벗이자 전쟁광
  • 김응종
  • 승인 2022.10.20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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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㉛_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카리스마의 화신이자 전쟁광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고스란히 그 부담을 떠 안아야 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경이로운 인물이다.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으로 본토 프랑스인들의 멸시와 조롱을 존경과 감탄으로 바꿔,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황제가 된 인물. 역사적으로 황제는 많지만 모두 제위를 계승했거나 찬탈했거나 혹은 왕이나 유력자로서 제국을 건설해 황제로 등극했지 나폴레옹처럼 ‘흙수저’에서 황제가 된 사람은 전무후무하다. 

성공에 도취한 나폴레옹은 자신이 운명이나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라고 생각했으며, 자기의 생일인 8월 15일을 성 나폴레옹 축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불멸’ 이미지는 계속돼, 1821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은 후에도 황제는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황제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프랑스혁명의 평등주의를 성취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돌아올 거라는 신화가 특히 민중 속에 퍼져 있었다. 덕분에 그의 조카가 삼촌의 후광으로 황제가 됐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능력과 리더십으로 황제가 됐다. 그는 포병장교로서 수학에 특히 뛰어나, 수학에 기반한 과학적 전술을 세웠고, 전장에서는 병사들과 한 몸이 돼 싸웠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명령만 내리고 통제하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병사들과 함께했다. 함께 이집트의 뜨거운 사막을 행군했고, 함께 러시아의 혹한을 견뎌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적을 분리해 수적 우위를 확보한 후 격파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행군은 그만큼 더 가혹했다. 

나폴레옹은 용감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난관에 부딪히면 언제나 정면 돌파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엘베 섬에서 일종의 유배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부가 자기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본토로 돌아가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결심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본토에 상륙해 파리로 북진하던 중 루이 18세가 그를 체포하라고 파견한 병사들과 마주쳤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홀로 당당하게 병사들 앞에 나아가 외쳤다. “나는 제군들의 황제다. 제군들 가운데 황제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 쏴라!”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 나폴레옹은 “황제 폐하 만세”라는 함성을 들으며 ‘독수리가 날 듯’ 파리까지 단숨에 진격했고, 다시 제위에 올랐다. 

나폴레옹이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무정부상태를 끝냈고 성과를 계승했지만, 지나치게 호전적이었다. 전쟁 승리를 통해 권력을 잡은 사람으로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 승리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전쟁에 매달린 것은 운명적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 측에서만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니, 이 점에서만큼은 전쟁광이라는 악평이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호전적이었지만, 그의 두 차례 양위 과정을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에도 나폴레옹에게는 여전히 군대가 있었으며 최종 승리의 자신감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파리 시가전을 포기했다. 내전은 엄청난 희생을 동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카리스마를 동반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태를 기회주의적으로 관망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중 속에 있었고,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민중에 휘둘리는 나약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민중을 조종하거나 민중에 영합한 포퓰리스트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독선과 독단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그의 치세 내내 독재와 전쟁의 고통을 겪었다.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사학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낭트대에서 석사, 프랑쉬콩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 평생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서양사개념어 사전』(살림, 2008), 『관용의 역사』(푸른역사, 2014),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푸른역사, 2022)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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