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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난 시대에 스스로 되묻는 연구 의미
기후재난 시대에 스스로 되묻는 연구 의미
  • 김일환
  • 승인 2022.10.11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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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김일환  한동대 GLS학부 강사

연구자들은 무엇을 위해 연구하는가? ‘연구’라는 활동이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 항상 머릿속에 명료한 답을 가진 채로 살아가지는 않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무수히 많은 전문분야로 나뉘어져 “항상 낡아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결과물을 산출할 뿐인 현대 학계에서, 연구자들은 학계 외부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보일 문제들에 몰입하는 “기이한 도취와 열정”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연구논문들을 훑고, 자료 무더기에 파묻혀 들어가는가 하면, 무언가 새로운 (더 정확히는 동료들에게 새로운 것으로 인정받을 만한) 결과가 나올지에 전전긍긍하기 바쁜 연구자들의 일상은, 지금 각자가 붙잡고 있는 문제들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서야 간신히 지탱된다.

그런데 가끔 이런 ‘기이한 도취’ 상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서, ‘연구자’로서의 나의 기이한 일상과 내가 사회 속에 놓인 위치를 낯설게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책상물림에 그치는 내 성향 탓이 크기도 하겠으나, 그럴 때면 대개 ‘연구’라는 이름으로 활자 속의 고상한 말들에 집중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각자 다른 계기를 통해 찾아올 이런 낯선 느낌을 통해서, 연구자들은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연구의 의미’라는 질문을 새삼 무겁게 대면할 것이다.

나의 경우 최근에는 2022년 8월 8일 월요일이 그 순간이었다. 그날은 학교 도서관에 학위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마감일이었다. 작은 성취감과 큰 자괴감으로 범벅이 된 채 방에 틀어박혀 그다지 의미 없는 사소한 수정과 재검토를 반복하는 동안, 하루 종일 굵은 비가 내렸다. 홀린 듯 밤 10시가 넘어서 제출을 마무리한 뒤에야 알았다. 

바로 그날의 비로 수도권 일대 곳곳이 물바다가 되었고,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의 반지하 거주지에서는 3명이 침수로 목숨을 잃었음을. 언덕 중턱의 내 집 아래쪽에 있는 재래시장에도 가슴팍까지 빗물이 차올라 극심한 피해가 있었다. 물론, 그날의 비가 보통 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더 일찍 알았던들 무얼 어찌했을까. 그렇지만 바로 아랫동네가 물바다가 될 때까지 폭우가 쏟아져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기만의 ‘연구’에 골몰하던 나의 모습은, 마치 풍자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례적 기상 현상의 연속이었던 이 여름을 지나면서, 나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우리가 이미 기후위기의 한가운데 놓여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늦은 감각이 나의 일상을 당장 극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일상생활의 절박한 과제와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이를 오히려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소위 ‘학구적 태도’ 역시 버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미 시작된 기후재난 시대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몰두하는 ‘연구’라는 기이한 활동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나누고 싶다. (더군다나, 인쇄되었다가 곧 버려지는 무수한 책자들, 포스터와 현수막, 각종 기계장비의 구동, 국제학술교류 명목의 항공 이동 등 학계 자체가 이미 막대한 탄소 배출의 현장이 아니던가.)

특히, 기후위기가 현대적 삶의 거의 모든 양상 - 노동, 에너지, 대도시적 생활양식, 의료와 돌봄체계, 난민과 시민권, 식량체제, 성장물신주의 등 – 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따라서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도 기술공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인문학․사회과학의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이전보다 더 주목하게 된다. 

불타고 물에 잠기는 세계 속에서 연구자들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하루가 다르게 전문화되어 가는 연구주제 속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씨름할 수 있는 공통의 숙제가 무엇일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겠다는 막연한 다짐 역시 하게 된다. 앞으로도 심화될 기후위기의 한복판에서, 언제까지나 언덕 중턱의 관찰자 시점에 머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김일환  한동대 GLS학부 강사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한국 사립대학체제의 형성과 재단법인의 정치」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한국 사회의 교육, 복지, 의료 등의 영역에 뿌리내린 민간 재단의 독특한 구조와 성격을 해명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절멸과 갱생 사이: 형제복지원의 사회학』(공저)이, 논문으로는 「‘부재지주’, ‘영리기업’에서 ‘기생적 존재’로: 1950년대 문교재단의 경제적 실천과 한국 사립대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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