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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_미국유학과 학문의 정치사회적 효과
논평_미국유학과 학문의 정치사회적 효과
  • 홍성민 동아대
  • 승인 2006.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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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의 ‘한국의 지적 장은 식민화되었는가?’를 읽고

김현경 박사의  ‘한국의 지적 장은 식민화되었는가?’(비교문화연구 12집 1호)라는 논문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가 대단히 논쟁적이어서 학계의 관심을 끌만하다. 그런데 김 박사의 글은 기존의 입장을 부정하기 보다는 학계의 현실을 보다 정교하게 분석하기 위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본인의 생각은 반론이라기보다는 논의를  발전시켜가기 위한 토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 박사는 우선 “지적 식민주의”라는 용어자체가 개념적으로 불분명하다는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녀가 “지적 식민주의” 담론의 내용을 거부하는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지식시장이 겪고 있는 비정상의 원인이 과거 식민지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연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지식의 비대칭성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의 일반적인 현상이며, 그 이유는 학문의 언어 자체가 영어를 중심으로 하는 특수한 언어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필자는 외국유학을 바라보는 김 박사의 입장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필자는 용어의 불명확성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한국학계가 심각하게 왜곡돼있고, 그 원인이 무분별한 외국유학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유학이 초래하는 폐단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자. 첫째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유학이 교수자리를 보장하는 잘못된 관행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적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들의 계급적 서열화가 학자들의 서열화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학문적 능력이 아니라 비학문적 요인에 의해 학자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 현실적으로 아무리 탁월한 문제의식과 자생력이 강한 패러다임으로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더라도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영어로 쓰고 말한다는 것은 기존 학계의 관행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학계의 기득권자가 누리는 독점적 특권은 물질적 보상(교수자리, 연구비 등등)으로 신참자들의 진입을 통제하는 것이다. 둘째는 학문의 내용을 왜곡하는 차원이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개념과 문제의식이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계는 자신의 문제의식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모른 채 미국식 이론과 분석틀에 매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우리의 이론”, “자생적 분석틀”이라는 구호에 얽매여 서구의 이론이 필요 없다는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푸코나 부르디외가 아니라 정약용이나 유길준만을 연구하면 한국적 이론이 만들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국의 학계가 ‘이론의 사회적 효과’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학문의 내적 정합성 못지않게 이론의 정치사회적 효과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했다면 ‘거버넌스’, ‘민주평화론’ 따위의 개념들을 동원하는 연구 작업들에 그렇게 많은 연구비를 지원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셋째는 학문의 장에서 전개되는 왜곡의 효과가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가 근대화이론에 근거해 일정한 정당성을 획득한 사실은 이제 상식이고, 오늘날 미국식 신자유주의 논리가 확산돼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식 기능주의 학문의 영향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남북간의 연대를 위한 구상을 두고 한국의 시민사회 내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엄청난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데, ‘인권’이라는 개념자체가 최근 미국의 정치학이 독특한 맥락에서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한국에서 학문(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한정하자)은 학자와 지식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념과 문제의식 그리고 연구주제를 조절함으로써 미국의 문화적 패권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칭이야 어찌됐건 미국에 대한 한국의 지적 식민상태는 과거보다 현재 훨씬 정교하고, 강고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필자는 단언하는 바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한국외교의 딜레마와 시민사회의 경제적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홍성민 / 동아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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