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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의 ‘숏폼’ 문고본 시대가 다시 열리기를
출판의 ‘숏폼’ 문고본 시대가 다시 열리기를
  • 김병희
  • 승인 2022.10.06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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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⑧ 『삼중당문고』

영상 분야에서 ‘숏폼’ 콘텐츠가 대세다. 숏폼은 짧다는 ‘숏(short)’과 형태인 ‘폼(form)’의 합성어로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지칭한다. 바이트댄스의 틱톡(TikTok), 인스타그램의 릴스(Reels), 유튜브의 쇼츠(Shorts), 넷플릭스의 패스트 래프(Fast Laughs) 같은 서비스는 숏폼 콘텐츠를 위해 개설됐다.

출판 분야에서도 1970년대에 얇고 조그만 문고본 열풍이 불었다. 읽는 숏폼 콘텐츠라 할 문고본은 요즘 유행하는 숏폼 콘텐츠의 원조가 아니었을까? 1970년대에 여러 출판사에서 문고본을 발행했지만 삼중당문고가 단연 독보적 존재였다.

도서출판 삼중당의 『삼중당문고(三中堂文庫)』 광고를 보자(조선일보, 1975. 2. 12.). 광고 오른쪽에 세로로 삼중당문고라는 이름을 부각시키고 그 옆에 “범국민적 독서의 생활화를 위한 일대 캠페인”이라는 부제를 붙여, 제1차 100권 발행을 알렸다.

삼중당의 『삼중당문고』 광고(조선일보, 1975. 2. 12.)

위쪽에 배치한 헤드라인은 이렇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예지. 문학의 정수를 완전 포키트화한 교양의 도서관.” 여기에서 ‘포키트화(化)한’이란 호주머니(pocket)에 쏙 들어갈 크기의 책이란 뜻이다. 문고본 1권부터 100권까지를 책꽂이에 꽂아놓은 듯 배치했으니, 책 제목이 저절로 드러났다. 

1권인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 2~3권인 이광수의 『흙』, 4권인 불핀치의 『그리이스·로마 신화』(장왕록 역)에서부터 시작해 99권인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황동규 역), 100권인 솔제니친의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박형규 역)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현대의 명작을 두루 망라했다.

삼중당문고22 진달래꽃 표지(1975)

6~7권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13권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14권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번민』, 22권인 김소월의 『진달래꽃』, 24권인 이상의 『날개』, 89권인 사르트르의 『구토』, 97권인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도 있으니 시와 소설은 물론 철학 에세이 같은 장르를 넘나들었다. 광고에서는 200원 균일가가 “국민(國民)의 정가(定價)”라고 강조했다. 

문고본의 특장점에 대해 하나씩 별표를 해서 강조한 보디카피는 이렇다. “★동서고금을 통해 문학·교양 등 불후의 명작·명저를 총망라! ★해당 저작의 전문 연구가에 의해서 원전대로 번역한 완역본! ★학생을 위한 학습 자료로써 해설·작품 감상·저자연보를 수록! ★직장인·현대여성의 일일일책(一日一冊) 독파를 위한 독서 풍토의 혁신! ★학급문고·직장문고·새마을문고로 적절한 도서의 정선된 목록!” 날마다 한권의 책을 독파(讀破)하자는 ‘일일일책’ 독서 캠페인이 야심차게 느껴진다.  

삼중당문고의 1차본 100권은 1975년 2월 1일에 초판이 발행됐다. ‘새로운 지식의 신속한 전달과 염가 제공’을 목표로 권당 200원의 균일가에 판매된 삼중당문고에 독자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문고본이 인기를 누린 배경에는 정부와 여러 단체에서 추진한 독서 장려 캠페인이 있었다. ‘자유교양경시대회’의 대통령기 쟁탈을 위해 학교 차원에서 우수 학생을 선발해 ‘고전읽기’에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측면도 있었지만, 이런 대회가 학생들의 독서 체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삼중당의 서건석 사장은 문고본의 말미에 실은 “삼중당문고 발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에서, 수록될 내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 과학, 전기, 수필, 사상 전반에 걸쳐 이미 그 가치가 확정된 것만을 간추려 “누구에게나 일생의 교양이 되고, 우리 문화의 질서와 재건에 이바지할 수 있는” 책을 출판하겠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문고본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こ?ろ)』을 1927년에 첫 권으로 발행한 일본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의 영향을 받았다. 

장정일의 「삼중당문고」는 문고본 시대를 추억하는 슬픈 시다.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문고/150원 했던 삼중당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문고….”(하재봉 외. 『시운동 시선집』, 푸른숲, 1989, 130~133쪽.). 삼중당문고에 얽힌 사연을 무려 네 쪽에 걸쳐 회상했다.

책이 귀하고 소중했던 시절에 독서 인구의 저변을 확대한 삼중당문고는 사람들에게 책 읽기의 경험을 제공하면서 의식주 문제의 해결에 못지않게 교양과 지식의 허기를 채우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이제 다시, 문고본의 부활 소식이 들려온다. 민음사의 ‘쏜살문고’, 마음산책의 ‘마음산문고’, 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가 나오고 있다. 지금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들 한다. 여러 분야에서 레트로 열풍이 불지만 유독 책의 레트로 바람은 불지 않아 안타깝다. 출판사에서 읽는 ‘숏폼’ 콘텐츠인 문고본을 기획하면 독자들이 호응할 것이다. 그리하여 독서의 전성시대였던 문고본 시대가 다시 열리기를 기대한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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