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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만9천488명…해외입양 최대 송출국의 새로운 질문들
16만9천488명…해외입양 최대 송출국의 새로운 질문들
  • 신필식
  • 승인 2022.10.0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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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26 여성주의 해외입양 연구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나는 당시의 친생모의 입양결정을 
가부장적 사회와 제도적 상황 속에서 
자녀의 보호와 자신의 생존은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순응과 저항, 선택에 있어 
강제와 자발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교차적이고 다의적 결정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기고문 마감일은 그제였다. 사흘 전 교수신문 기고 담당자분께 전화를 드렸다. “제가 이틀 후에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anish Korean Rights Group)’에 속한 쉰세 명의 한국 입양인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권위주의 시기에 입양된 자신들이 입양되기까지 겪은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를 신청하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이 내용까지 포함해 쓸 수 있도록 마감 연장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의 공동대표 피터 뭴러 씨가 2022년 8월 23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해외입양인 인권침해 조사를 신청한 뒤 접수증명원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여성학의 길 위에 서다

나는 해외입양 역사와 당사자인 해외입양인의 경험, 한국에서 입양을 보내신 친생가족 경험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해외입양 연구자이고, 이러한 주제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는 여성학 연구자이다. 나의 박사논문 주제이자 현재의 나의 삶과는 뗄 수 없는 해외입양과의 인연은 2008년 석사 졸업 후 스웨덴 유학을 준비하던 즈음에 시작되었다. 

석사에서 환경학을 전공했던 나는 북유럽의 사회가 이룩한 환경정책뿐 아니라 사회, 역사, 정치 전반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다음 학업을 그곳에서 이어가고자 했다. 알려진 바대로 북유럽은 이상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국가나 체제가 밟아본 적이 없는 환경, 복지, 성평등의 영역에서의 경험이 궁금했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2009년 1월 스웨덴 방문 중에 한 해외입양인의 초대로 재스웨덴한인입양인협회(AKF, Adopterade Koreaners Förening)의 신년회에 참여했었다. 그날 모임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술이 오르자 해외입양인 친구들과 모임 장소였던 한국식당 한켠의 노래방 기계가 있는 방에서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는 열 살이 가까운 나이에 입양이 된 마크 형이 있었는데, 형은 한국말을 이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했다. 마크 형에게 한글은 생존을 위해 지운 한국의 많은 것 중 하나였을 것이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가 큰 형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형은 노래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듯했고, 그런 형을 본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잊기 어려운 어떤 순간을 마주한 듯했다.

그 후 그날 모임에서 만났던 한국계 해외입양인이자, 스웨덴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와 난민・이주 분야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연구해온 토비아스 휘비네트 박사를 찾아가 해외입양에 대한 자료를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태어나 자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가장 많은 한국 아이들이 스웨덴은 물론 전 세계로 입양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왜, 내 또래 친구와 동생들이 그렇게 많이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 의문은 날로 커지며 나를 여성학의 길로 데려다주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아동수는 1970년대와 1980년대가 한국전쟁 이후보다 훨씬 많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적지 않은 수의 해외입양이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2010년대가 돼서야 1960년대 이하 수준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별로는 1980년대가 가장 많았고, 연도로는 아시안게임 1년 전인 1985년이 8천837명으로 가장 많은 해였다. 출처 : 각 연도 보건사회연보 및 보건복지부 해외입양 통계

여성주의 해외입양 연구자로 걸어가며

나는 여성학적 관점에서 해외입양 친생모를 통해 어떻게 한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자국의 많은 아이들을 외국의 가정으로 입양 보내게 되었는지를 연구해 박사과정을 마쳤다. 나는 연구를 통해 낯섦과 전환, 새로움을 찾고 나누고 싶었다. 

첫째, 낯섦을 마주하고 넘어서고자 싶었다. 지금껏 해외입양은 여성학 연구에선 다룬 적이 없는 낯선 주제였다. 처음엔 해외입양을 연구하려고 여성학을 시작했지만, 박사과정 수료를 할 때 쯤엔 해외입양으로 학위논문을 쓰는 건 불가능해 보여 다른 주제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더 쉬워 보이는 길이 나에겐 더 어려웠고, 결국 2년 정도가 지나 해외입양으로 돌아왔다. 같은 연구실의 여성학 동료들과는 해외입양에 대해 깊은 이해와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다양한 학제적 배경의 해외입양 연구자 동료들과의 연구모임도 만들었다. 연구모임도 기대했던 연구자 간 상호지지나 국내외 연구 흐름의 파악, 공동연구까지 이르긴 쉽지 않았다.

여성학에서 다루지 않는 주제로 논문을 쓰려니 해외입양에 대한 관점, 방법론, 연구자료 등을 기초에서 하나씩 쌓아야 했고, 더디고 힘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 두렵고 외로웠다. 힘들었지만 논문을 완성했을 때 보람은 컸다.

둘째, 해외입양 인식의 전환을 모색하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연구를 통해 해외입양에 관하여 정형화된 인식과 기억을 극복하려는 접근이 부족했다. 국가간 입양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처음 도입된 새로운 형태의 아동 구호·복지의 한 형태이다. 한국은 새로운 입양 방식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최대 송출국으로 1953년 네 명부터 시작해 2021년 백23명까지 공식 통계로만 16만9천488명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한국전쟁 전후 도입 이후 수십 년 간은 홀트로 대표되는 입양기관의 관점과 비슷하게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찾아주는 인도적 실천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을 전후로는 한국이 입양기관을 통해 ‘아이들을 팔았다’는 비판도 등장하면서 이분적인 담론이 혼재해 왔다.

인도적 실천으로서 구호나 아동수출, 둘 사이 어디에도 버려진 아이가 왜 1980년대에 한 해에 만오천 명씩이나 발생했고, 왜 그중 팔천 명이 넘는 아이가 외국으로 입양되어 갔는가를 질문한 연구는 나오기 어려웠다. 어떻게 만오천 명이 버려질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가능했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말이 어떻게 등장하고 통용되었는지 질문해야 할 것 같았다. 

열쇠는 떠나갔던 아이들보다는 그것을 결정한 친생부모, 특히 어떤 이유로든 헤어질 결심을 한 친생모가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친생모의 경우에도 아이를 보낸 후 생애에 걸쳐 쉽게 벗어나기 힘든 깊은 침묵의 자리로 자신을 유배시키는 경우가 많아 그녀들과 연구자 사이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벽 자체를 연구질문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 뒤의 가려진 친생모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내가 연구자로서 내 앞에 보이는 벽의 모양은 어떠한지, 어떻게 이런 큰 벽이 처음 세워지기 시작했는지, 또 계속 높아져 갔는지를 분석해 빈약하기 그지없는 해외입양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새롭게 하고자 했다.

셋째, 친생모의 입양결정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다. 다른 학제가 아닌 여성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가능한 친생모의 입양결정 접근방식을 찾고 싶었다. 해외입양을 결정한 친생모의 결정을 단순히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희생자이거나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로서의 주체적 결정, 어느 한 측면만으로는 당시 그렇게 많은 친생모이자 여성들이 내린 결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은 늘 큰 과제였다. 

대신 나는 친생모의 입양결정에 대해 가부장적 사회와 제도적 상황 속에서 자녀의 보호와 자신의 생존을 확보함은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순응과 저항, 선택에 있어 강제와 자발이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다의적 결정’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렇게 볼 때 당시 왜 그렇게 많은 친생모가, 즉 입양을 위해 헤어짐을 택한 여성이 그렇게 많았는지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다의성을 뒷받침할 자료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늘 가장 큰 숙제였지만 이어올 연구자를 위해 무엇이든 찾고 정리해 남기고, 언젠가 해외입양인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다는 목표는 5백 쪽이 훌쩍 넘는 논문을 쓰기까지 나를 지탱해주었다. 

현장을 보면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근본적으로 입양체계는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사진은 영화 '브로커'의 한 장 면이다. 

여성학 연구자에서 연구활동가로 

2020년 가을, 코로나19가 시작된 해에 나는 여성학 연구자로 사회에 나왔다. 졸업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 사회과학, 그 가운데 여성학 연구자인 박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이제 과정생, 수료생이란 이름표 대신 박사로 바뀐 것은 오랜 빚을 갚은 듯 홀가분했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직후, 한 보수 신문에서는 남학생인 내가 여성학과 대학원을 진학한 것이 신기한 듯 인터뷰를 제안하기도 했다. 다분히 ‘무슨 생각으로 사양 학문(?)으로 문을 닫는 대학이 느는 여성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느냐’라는 의도가 담긴 제안이었다. 이후 2015년 여성학이 저점의 끝을 향하던 시기에는 대학원 신입생 지원이 너무 줄어들어 대학원 선후배들과 팔을 걷어붙이고 학과 홍보를 겸한 학부생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은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기점으로 ‘페미니즘 리부트’가 진행되면서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학원 여성학과의 지원자 수는 이전 추세를 회복했고, 페미니즘이 사회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다시 자리 잡아갔다. 더 나아가 2020년대 접어들면서는 단순히 한 학문 분야로서의 회복 수준을 넘어, 이제는 젠더가 세대, 계층, 지역 등과 함께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로 자리 잡아가는 상황에 이른 듯하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여성학과 페미니즘이 주목받는 만큼 학문으로서도 여성학은 다양한 의제를 갈무리하고 진전시키고 설명해내는 역할을 하였는지, 또 나는 그 속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질문하는 횟수도 늘어가고 있다. 

가족·돌봄·남성성과 해외입양 연결하기

다른 인문・사회과학 분야와는 달리 국내에서 여성학은 대학이라는 고등교육 체계 내에 연구와 교육을 통한 학문 재생산 구조가 덜 갖추어진 영역이다. 이는 박사 졸업생이 학교에 자리 잡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졸업 후에 잠시 대학 강사와 여성정책기관의 연구원으로 가려고도 했지만, 우선 현장의 필요가 자꾸 눈에 들어온 나는 현재 연구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먼저, 서울의 여성역사 연구와 문화예술 전시・교육 공간 기능을 함께 하는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에서 현대 서울 여성 인물에 대한 구술연구를 수행하면서, 일반인과 공무원, 양성평등교육 강사를 대상으로 성평등과 젠더 분야의 강의를 하며 여성학 연구자로서 경험을 넓혀가고 있다.  

한편 2020년 연말 양천아동학대사망사건(정인이 사건)을 지나면서 입양기관 중심의 입양 체계를 공적 체계로 전환시킬 필요성에 공감한 관련 당사자(국내입양인, 해외입양인, 친생부모, 양육미혼모, 입양부모, 그리고 입양 관련 전문가)가 모여 조직한 「입양의 공공성 강화와 진실규명을 위한 연대회의(입양연대회의)」에서 비상근 사무국장을 맡아 국회와 현장, 언론에 당사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입양 공공성을 위한 『입양특례법』 전면 개정과 이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헤이그 국제아동 입양협약』 국내 비준, 영화 「브로커」에서 다루어졌던 ‘베이비 박스’의 확대를 시도하는 법안인 『익명출산제』 법제화 반대 등의 활동에 그때그때 참여하고 있다. 박사논문에서 1966년부터 1992년까지 시기를 다루었지만, 현장을 보면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근본적으로 입양체계는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당사자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목소리와 힘을 가진 입양부모, 입양기관, 해외입양 입양국의 관점에 비해 친생부모, 입양인, 해외입양 출생국 사이에는 상당한 발언 기회와 정치적 영향력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더는 미루면 안 될 과제들이기에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올해부터는 한국 해외입양인 인권운동의 허브 역할을 해온 「뿌리의집」의 전문위원으로 활동도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공모한 「해외입양인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통한 인권보장 방안 연구」에도 연구원으로 참여해 지금껏 가려져 왔던 해외입양인의 인권실태를 확인하고,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생각보다 큰 아픔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덴마크 한국인 진실규명 그룹」의 조사 신청도 덴마크와의 줌 회의를 해가며 준비해 무사히 마쳤다. 해외입양인의 출생국에서 그분들을 위해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예전 마크 형의 노래를 잊지 못하고 잊는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다. 

오래 행복하게 

현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러 의제가 운동의 의제인 동시에 논문으로 쓰고 싶은 주제로 보이는 나는 ‘천상 연구를 좋아하고 놓지 못하는 연구자구나’ 싶다. 앞으로 여성주의 해외입양 연구자로 살아가며 아동, 가족・모성, 재생산권, 돌봄 이론과 같은 여성학 연구주제들과 해외입양을 연결해가고 싶다. 그런 연구로 한국 사회와 역사, 경험에 대한 이해와 기록을 결합해가고 싶다.

현장과의 밀접한 관계와 활동도 아직 전형적이진 않지만 나름 여성학자로서 학문 경계를 넓히고, 현장에 더 가까운 여성학을 찾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해외입양 연구를 통해 여성학은 물론 한국의 해외입양 경험과 역사를 연구·기록하는 데 기여하고, 더 나은 현실과 제도를 만들기 위한 참여자의 역할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길 바라는 욕심 많은 여성학자로 살아가고 싶다. 오래 행복하게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성공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신필식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 연구위원
여성주의 해외입양 연구자.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에서 「한국 해외입양과 친생모 모성, 1966~1992」(2020)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간 입양과 한국 해외입양을 통해 친생모에 대한 시선, 가족・모성 정상성의 경계가 재구성되는 과정에 대해 비판적 연구를 하고 있으며, 돌봄 윤리와 남성성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여담재’의 서울 여성역사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면서, 공무원과 일반인 대상 성평등과 젠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입양인 인권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양연대회의’ 비상근 사무국장, ‘뿌리의집’ 전문위원으로서 활동하면서 국내의 입양 공공성 강화를 위한 활동, 「해외입양인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통한 인권보장 방안연구」, ‘덴마크 한국인 진실규명 그룹’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신청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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