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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언_밀의 ‘자유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전문가 조언_밀의 ‘자유론’,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04.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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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반민주적 틈새 지적…公利보다 자유가 우선

천재와 범인의 차이는 재능 자체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평가하는 능력에 있다. 그런 면에서 천재임이 확실한 밀은 자신의 수많은 저술들 중에서 ‘자유론’이 가장 오랜 생명력을 지닐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했다. 밀의 예언대로 ‘자유론’은 민주주의가 대립 이념들과의 경쟁 상황에서 벗어나 유일한 규범적 정치이념으로 승격되는 시점에서 역설적으로, 그러나 체제 내적으로 민주주의에 숨어 있는 반민주적 틈새를 지적하고 이러한 결함이 확대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적극적 해결책을 제시한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밀이 이 책에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 것은 이 책의 그러한 기념비적 성격에 주목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이 책이 그의 오랜 지적 동반자이자 연인인 해리엇(Harriot Taylor)과의 애틋한 교감의 결실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밀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이 책을 “여러 번 함께 읽어보고, 여러 각도로 재검토하고, 또 사상이나 표현에 있어서 [그들이] 발견한 잘못을 모두 조심스럽게 고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자서전’) 그래서 ‘자유론’은 밀의 다른 글들에 비하면 문장 자체가 조금 더 꼼꼼하고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진다. 쉽게 훑고 지나가기보다는 두 사람의 숨결을 느낀다는 기분으로 문장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비록 그럴 여유가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적 준거틀을 수용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을 천착하는 노력은 피해갈 수 없다. 얼마 전에 강정구 교수의 컬럼과 관련하여 논란이 벌어졌듯이, 밀이 ‘자유론’에서 적시한 사상의 자유와 다수결 원칙의 충돌은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미 고전적이며 여전히 현대적인 문제다. 흔히 인용되듯이 “가령 한 사람만을 제외한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단지 한 사람만이 그것에 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인류가 그 한 사람에게 마음대로 말 못하도록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말 못하도록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라는 밀의 말은 인류에게 각인된 지 이미 오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는 먼 미래의 목표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에 대한 밀의 강조는 행위의 자유 일반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들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허용되어져야 한다. 설령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스스로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머지않아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할 것이다. 반대로 인류역사에서 종종 그러했듯이 그러한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닐 가능성도 언제나 열려 있다. 이질적인, 그러나 창조적인 소수를 보호함으로써 인류는 가외의 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그러한 행위가 사회 대다수 성원들에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것이 스스로에게 제한된 행위라면 그것은 연민이나 혐오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노나 원한의 대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점차 개성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밀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대체 무엇이 나의 지위에 적합한 것일까? 나와 같은 신분과 경제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보통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또는 나보다 높은 신분과 경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보통 하고 있는 일은 대체 어떤 것일까?’라고 묻는다.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은연중에 다수의 편에 서기를 기대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적인 현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밀의 시대로부터 1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이른바 개성의 시대, 다원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자유론’은 이론적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는 독자, 특히 밀을 통해 공리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무수한 반전과 역설의 드라마다. 각자의 견해에 따라 차이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공리주의자는 자유보다는 효용을, 소수보다는 다수를 중시한다. 그러나 이미 ‘공리주의’에서 쾌락의 양보다는 질을 강조함으로써 벤담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했던 밀은 ‘자유론’에선 더욱 노골적으로 효용이 아니라 자유를, 다수의 견해가 아니라 소수의 개성에 대한 보호를 전면에 내세운다. 물론 밀은 그러한 전도의 이유를 공리주의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스스로의 학문적 뿌리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후대의 학자들이 부연하는 것처럼 밀은 공리주의를 2차적 원리로, 또는 비의적(esoteric) 원리로 물러서게 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용보다 자유를, 다수보다 소수를 우선시하는 공리주의자를 공리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문과 해답은 모두 ‘자유론’에 있다.

정원규 / 서울대·윤리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도덕합의론과 공화민주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리주의에 대한 패러다임적 독해'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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