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誤讀에 기초한 단정적 평가가 더 문제
誤讀에 기초한 단정적 평가가 더 문제
  • 김일영/성균관대·정치사
  • 승인 2006.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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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쟁-해방전후사 재인식(2):홍석률 교수의 논평에 대한 반론

먼저 반갑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필자가 편집에 참여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출간 이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다. 이 책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책 전체를 꼼꼼히 읽고 그 내용을 문제 삼는 글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문보도 내용이나 책의 머리말만 읽고 멋대로 예단(豫斷)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조금 낫다는 것이 첫 번째 논문과 마지막의 편집자 대담 정도를 읽고(그것도 대충) 수박 겉핥기식의 총론적 평가를 내리는 식이었다(이 점에 관한 한 ‘교수신문’의 초기 보도 내용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던 차에 개별 논문의 내용을 문제 삼는 구체적인 글을 보게 되니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움이 앞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논평은 정확한 독해를 기초로 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필자의 글에 대한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의 논평은 많은 부분 오독에서 비롯된 것 같아 안타깝다. 평자는 크게 세 가지를 문제 삼고 있다.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한 전시(戰時)정치를 평가함에 있어 필자가 독재와 민주라는 차원을 배제했고, 미 행정부 내의 관료정치를 도외시했으며, 이승만 외의 다른 정치가들도 전쟁과 정치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하나씩 따져보자.

우선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평자는 필자에 앞서 전시정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평자의 글을 비롯한 기존연구는 사료이용의 편식, 정치제도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지나치게 도덕적인 관점 등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필자의 글은 기존연구가 보여준 이런 문제점을 교정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기존연구와 필자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당시 정치를 보는 관점에 있다. 기존연구는 전쟁 중 이승만이 얼마나 비민주적이었고, 그 배후에서 미국이 어떤 작용을 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자는 이 점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이 논문에서도 “부산정치파동에서 드러난 이승만의 탈법적 행위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다만 여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당시 정치가 온전하게 복원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부산정치파동에는 독재냐 민주냐의 차원 외에도 신생국이면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 적합한 정치제도가 무엇이냐는 것과 전쟁수행정책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과 그것이 내화(內化)된 국회 대 행정부의 갈등이라는 중요한 두 차원이 더 있었다. 그런데 기존연구는 초점을 오로지 이승만의 비민주성을 드러내는 데에만 맞추다 보니 나머지 두 차원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의 핵심이다. 기존연구가 지닌 일차원성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 차원을 덧붙여 삼차원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인데, 평자가 느닷없이 필자가 “독재와 민주라는 차원을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의아스럽다.

▲1952년 7월 4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는 양원제 구성, 정부통령 직선제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

그러면 필자와 기존연구 사이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 전시정치를 바라봄에 있어 기존연구는 어째서 일차원성에 머물고 말았는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료를 재구성하는 이론적 능력의 부재,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제도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기존연구는 모든 사료를 동원해 독재자 이승만을 단죄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그의 주장(대통령직선제)과 반대세력의 주장(내각제) 사이의 현실적합성을 따져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비판의 칼날을 이승만에게 들이대기에 급급했지 반대세력이 얼마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무원칙하고 휘발성이 높은 무리들이며 이런 상태에서 내각제를 시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말았다. 기존연구가 일차원성을 못 벗어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를 하나의 잣대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단일척도는 민주, 민족 등 도덕적 당위성으로 충만한 것이 되는 수가 많았다. 민주나 민족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집착할 경우 실제 역사가 지닌 복잡성과 복합성 그리고 역동성이 사상(捨象)될 우려가 많은데, 전시정치에 관한 기존연구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한편 기존연구는 사료 이용에서 이승만 쪽 기록을 지나치게 경시했다. 기존연구는 미국 측 기록을 철저하게 뒤져서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행정부 내부에서 벌어진 의견갈등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미국 본토에서 국무부와 국방부(군부) 사이에 어떤 대립이 있었고, 그러한 갈등이 한국에 나와 있는 미 대사관과 군부(유엔군) 사이에서 어떻게 재연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뒤에 쓰인 필자의 논문에서 과연 이것이 되풀이 될 필요가 있을까? 평자도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필자의 논문에도 미국 대사관과 군부의 입장 차이 등이 간략히 서술되었지만”이라고 쓴 것은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의 관심의 초점은 기존연구가 경시한 이승만 쪽 기록이다. 미국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시종일관 이 사안을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야당 및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국회와 전쟁 정책을 둘러싸고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 자신 사이의 싸움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이 국회를 이용해 이승만을 밀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평자의 말처럼 미국 내부의 관료정치를 무시한 “섣부른 단언(斷言)”이 아니라 연구의 초점이 다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동안 등한시 된 이승만의 생각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이 “전쟁과 정치를 수미일관되게 이해한 유일한 정치가였다”는 고 필자의 평가에 대해 평자는 다른 정치인이나 미국 등도 양자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과연 그럴까? 미국은 분명 전쟁정책과 국내정치 사이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으나 필자가 지적한 국내 정치가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주요 야당정치인들은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에게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의사에 반해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지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쟁취를 위한 내각제 개헌이었으며, 이러한 국내정치를 전쟁정책과 어떻게 연결시켜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국내정치와 전쟁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분명 이승만은 정치를 전쟁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유일한 정치가였다.

필자가 이승만을 이렇게 평가한다고 해서 그의 전쟁(북진)정책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전시상황에서 국내정치가 전쟁정책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인들을 이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특정인에 대한 호불호에 관계없이 중요하며, 필자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영/성균관대·정치사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이승만 통치기 정치체제의 성격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건국과 부국’, ‘주한미군- 역사, 쟁점, 전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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