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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비평_‘왕의 남자’에 머리 숙인 평단
메타비평_‘왕의 남자’에 머리 숙인 평단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4.03 0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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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추인하는 뒷북 비평 … 과잉된 의미 부여 눈쌀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가 1천2백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닌데도 이러니, 관객몰이 전략이 갈수록 치밀하고 집요해짐을 방증하는 듯하다. 이 영화가 왕으로 등극하는 동안 평론가들의 비평도 계속 발표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맥을 짚어내는 글은 매우 드문 듯하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작품일수록, 작품을 본 대로 느낀 대로 평한다는 것이 어렵긴 할 것이다. 흥행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평자 스스로도 자기최면을 걸어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한 글들도 많다. 영화를 예술로 봐야 할 지, 그냥 대중물로 파악하고 그 안의 이야깃거리를 풀어내야 하는 것인지 등의 질문 앞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다.


‘왕의 남자’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해석은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한겨레21’에 실린
영화평론가 남다은 씨의 ‘남근을 희롱하는 광대놀이’는 이 영화가 “관계의 영화”라고 부르짖는다.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 공길과 연산군(정진영), 연산군과 선왕 및 모친, 광대들과 궁궐 안 권력자들의 관계”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관계라는 사회학적,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말인가. 남 씨가 염두에 둔 관계는 영화 속의 “수컷”이 암컷을 짓누르며 자기들끼리 관계를 맺는다는 것, 왕과 광대의 수직적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억압성’이라 표현했어야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니다. 폭정 연산군의 그 슬픈 눈망울을 어떻게 그리 쉽게 외면하며 그의 권력자로서의, 남성으로서의 ‘결격사항’만 부각시킬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정당하지 못한 평론이다.


허문영은 ‘씨네21’에서 ‘왕의 남자’를 아주 길게 리뷰했다. 장생과 연산이라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스토리 구조를 요약하고, 또 다시 공길과 처선(장항선)이라는 두 남자의 서글픈 액자이야기를 읽어내다보니 분량이 길어졌다. 일단 작품의 구성요소들의 내적 기능을 자세히 분석하려는 모습은 호감을 준다. 그런데 장생과 연산에 비해 공길과 처선의 주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공길이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으로만 존재”하는 게 왜 ‘왕의 남자’의 영화적 약점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품의 동성애적 테마와 프로이트적 욕망구조를 강조하는 것도 타당성이 부족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동성애와 욕망의 문제는 별 생각없이 차용된 것이다. 욕망을 깊이 있게 다룬 게 아니라, 이뤄지지 않는 사랑의 안타까움이라는 결론에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왕의 남자’는 어떤 한 캐릭터를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는다. 캐릭터는 작가론적으로 해석됐다기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세팅됐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연산군의 경우도 우리의 역사 상식을 전혀 벗어나지 않고, 양반에 적대감을 느끼는 장생의 저항적 민중으로서의 캐릭터도 익숙하다. 이미 만들어진 전형을 등장시키는 데 있어서 생겨날 지도 모를 매너리즘은 애초에 감독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독자들의 눈은 그런 캐릭터의 구현보다는 광대놀이, 동성애, 왕의 사생활 등에 팔릴 것이니까. 감독은 빠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 관객의 눈이 한 사람에게 오래 닿아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왕의 남자’는 영악한 영화다.

평론가 이상용 씨는 ‘왕의 남자’를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실증성과 사실주의의 강박을 날려버리고 역사에 관한 표면화된 행동과 말들의 유희만 영화를 지배하지만, 그것이 진실을 담아내 관객의 마음을 찌른다”는 것이다. 그는 ‘왕의 남자’에 “삶의 중요한 상황에 취하는 몸짓의 과장된 진실”이라는 보들레르의 권위를 부여한다.


일견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근대소설의 효시인 ‘돈키호테’와 빗대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돈키호테’의 주제가 “인간의 욕망은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늘 엉뚱한 곳으로 투사된다는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 ‘돈키호테’에 대한 르네 지라르의 해석일 뿐이며, 그것이 ‘왕의 남자’에도 해당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 현대판으로 각색된 사극에서 연산군의 복수의 욕망은 칼로 변해서 그 대상인 선왕의 두 후처의 가슴에 그대로 가서 꽂힌다. 무엇을 근거로 엉뚱한 곳에 투사된다는 지 알 수가 없다. 역시 서구 욕망이론에 작품을 무리하게 짜맞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다. 또한 그가 말하는 ‘왕의 남자’의 진실도 애매하다. 어떤 것이 진실임을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제시하는 진실을 보았을 때 청중이 도덕적·인식적 충격이나 감화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용 씨는 “진실이란 아주 표면적인 것이며, 연극적인 것이며, 분장하는 것”이라며 묘한 방정식을 푼다. 인물의 행동이 그의 속내와 똑같으면 그게 진실이며, 영화는 진실을 잘 드러내는 것인가.비평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최후의 언어로서, 진실을 이렇게 쉽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유희적인 너무나 유희적인”이라며 작품을 분석할 때는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접하다가, 결론에서는 이 유희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는 식으로 문맥을 역전시키는 태도는 나쁜 이론적 습관이 아닐까.

전문 평론이 평론으로서 중심을 잡지 못하니, 신문에 실리는 이런저런 글들은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이를 계기로 한국 사극이 ‘와호장룡’처럼 세계 무대에서도 통했으면 한다”는 식의 말을 던진다. 아무리 전공이 역사이고 역사물이 뜨게 돼서 좋다고 하지만, 영화의 장르와 미학을 이렇게 통째로 무시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와호장룡’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쿵푸라는 매우 공격적 표현 속에 역설적으로 녹여낸 영상미학의 정점을 구가한 영화다. ‘왕의 남자’에는 세계에서 통할만한 미학적 표현이나 스토리가 없다. 다만 한국 관객들의 취향을 고려한 갈등관계와 감동적 요소들이 있을 뿐이다.


‘오마이뉴스’ 박준형 기자가 쓴 ‘광대의 가면 속에 숨은 알싸한 삶의 미학’이란 글은 더욱 비논리적이다. “연산군시대와 인간 연산군의 재조명”이라고 하면서 “연산군의 동물적인 정치감각은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와 허구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글들이 ‘왕의 남자’의 흥행을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일은 한국 영화의 장래와 관련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작품을 엄격하게 수용해야 할 평단과 전문기자들 사이에서 비평의 문화가 점점 왜곡돼 간다는 점이다. 특히 어떤 작품이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고 나서야 그것을 세련된 이론으로 추인하는 식의 비평문화가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고명철 광운대 교수(문학평론)는 “김훈, 김영하, 전경린이 한창 작품을 발표할 때 비평은 나오지 않았다. 전경린의 경우 작품이 당시 사회의 급진적 페미니즘과 결부되어 해석되고 급부상하면서, 그의 작품 전부를 모두 세련되게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추인하는 비평들이 붐을 이뤘다”라고 말했다. 눈치를 보고 있다가 이젠 말해도 안전하겠다 싶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상용 씨도 “언젠가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안 좋은 글을 썼다가 네티즌의 비난글로 도배된 적이 있었다”며 “한국의 경우 자본이든 네티즌이든 외부세력에 대해 자유로운 매체가 없기 때문에 비평가들이 에둘러 말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한 미술평론가는 우리 비평의 고질적 문제를 “외국이론에 의존하는 기지촌비평, 국내 비평에 대한 애정결핍, 자신의 철학이 없다는 것”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철학이 없다”는 것이 뼈아픈데, 이 말은 예술을 볼 때 비평가가 높이 평가하는 요소들이 그의 내면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돼 서로 상승작용함으로써 하나의 미학적 체계를 이루고, 실제 비평에서도 그 체계에서 걸러져 나온 말들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시류에 따라 이렇게 말했다가 저렇게 말했다가 한다는 것이다.


흥행과 시류, 한국 평단이 여전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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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가 2006-04-18 19:45:57
비평이 뭔지 공부 좀 하세요.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강의해 드리리다.
비평은,

첫째,왕의 남자같은 특정 텍스트를 놓고 내적 분석을 하는 것
둘째, 그 비평에 대해 다른 기준과 분석틀, 반증사례로 반박하는 것
셋째, 특정 텍스트에 대한 특정 비평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비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강 기자의 글은 굳이 나누자면 세 번째에 가깝다고 보여지지만, 실증적 취재과정도 없기 때문에 그저 소감이나 단상이라 불러야지요. 앞서 말했듯 메타비평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길 걸 가지고 우기세요.

강성민 2006-04-11 00:39:21
메타비평이란 비평에 대해 사유하는 것.
이 말은 수긍할 만하다.
메타비평은 추상적으로 할 수도 있고 비평에 대한 비평을 통해
할 수도 있다.
비평에 대한 비평은 담론비평, 비평비평보다는 메타비평이란 말이 어울린다.
아무튼 비평을 비평하는 과정을 통해 비평에 대한 메타적 사유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
다만 사유보다는 평가와 판단이 앞설 수 있는데...
그럴 경우 비평의 맥락과 언어, 정신 등을 음미하고 비평의 정의를 무너뜨리고 쌓아나가는 그럼으로써 비평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전형적(익숙한) 형태가 아닐 뿐이지
메타비평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쟁가 2006-04-10 00:20:40
내용은 차치하고 메타비평이란 말부터가 틀렸어요.
비평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하는 게 메타비평이라오. 비평을 비평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몇번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근거박약의 주장을 나열하는 게 메타비평이 아님도 분명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