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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서 탁해지는 춤과 허풍 비평
고여서 탁해지는 춤과 허풍 비평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6.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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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_한국창작춤과 비평, 그 신비화의 허울을 파헤친다

▲김현자의 바다 중에서 ©
춤은 살아있는 사람이 추는 것이다. 몸이 삶을 펼쳐가는 과정이 춤이다. 몸에 쟁여지는 다양한 시간의 흐름이 기억과 예감의 리듬으로 넘나들며 현존하는 것이 춤이다. 춤이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껴야 하고 무대가 세계의 풍경을 담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춤은 멈출 수 없고, 춤은 세계를 창조적으로 품는 것이다. 따라서 자명한 가치, 오래된 진리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힐 수 없다. 얽매이면, 머무르는 것이고, 머무르면 속박된 것이다. 통하였다면 마땅히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있는 춤이 갖가지 수사학을 동원해 신비화하는 건 저급한 이데올로기(신념 체계)때문이다. 기원을 숨기고 스스로 절대화하는 춤은 고인 채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유리된 채, 외로운 성곽 안에서 소멸의 길을 걷는 거야 제멋에 겨운 시도지만, 그에 대해 지나친 비평적 상찬으로 물신화시키는 건 비판의 대상이다.

한국창작춤은 전통춤과 단절하지 않고 어떤 연속선상에서 재창작한다는 서브장르다. 1980년대에 본격 형식을 갖추면서 탈춤이나 무속춤을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기존의 기생춤 위주의 창작풍토를 일신한다는 정신을 표방했다. 하지만 2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창작춤은 ‘어두운 추상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령, ‘무당되기 프로젝트’는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함몰된 춤의 형식이다. 왜 이 시대에 무당이 되어야 하는가, 무당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은 없다. 단지 무당이 되어야 하다는 조바심으로 항아리 위에 올라가 용왕님을 친견한다고 주장하고, 솟대 밑에서 무속춤을 추는 식이다. 무당이 무당이 되었다는 기분내기로 끝나는 무대에서 관객은 심드렁해진다.

‘음양오행의 재현’이나 ‘天地 우주론의 회귀’도 마찬가지. 오행의 다섯 색깔로 깃발놀이하거나 손수건 장난을 하면, 색깔이 가진 상징질서가 알아서 창작의 의미를 새롭게 해준다는 발상도 어처구니없거니와 사람이 살지 않았던 태초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엘리아데식의 제의(ritual)를 반복하는 한국창작춤의 형식은 완전히 죽은 형식이다. 어두운 무대에 샤막을 치고 포그까지 깔고 불가시의 춤을 추면서 태초의 신비를 보여준다는 건 기본적으로 착오행위다. 주체없는 시공간의 재현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다. 김충한의 ‘신화를 삼킨 섬’이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국내 콩쿠르용 창작춤을 만드는 그는 천둥번개까지 들이치게 하며 태초의 재현이 가지는 난센스를 급기야 촌극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현재 ‘어두운 추상화의 경향’은 한국창작춤 진영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전통춤 전공자로서 창작에 임하는 이들 대부분이 도제식으로 안무를 배워 위로부터의 하중에서 그다지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닫혀 있는 상황에서 천편일률적인 공연이 매년 무용계에 투입되는 예술기금을 사무적으로 소모하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 기생춤 위주로 흘렀던 전통춤과 신무용의 경향을 바로잡고, 이 시대와 통할 수 있는 가치 체계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상황은 절망적이다.

게다가 몇몇 무용평론가가 그런 고인 춤을 신비화하거나 절대화하려 한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랄까. 소통불능인데도 신비주의를 더욱 조장하는 비평은 몰염치에 가깝다. 일반적인 주례사 비평 수준을 가볍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가령, 김현자의 ‘바다’ 공연에 대해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김현자는 도의 세계를 춤으로 형상화하면서 애초에는 개념적이거나 논리적인, 이성적 사유의 일체를 거부했다”거나 “내면의 사색을 통한 坐忘과 象罔을 통한 체험을 중시했다”(춤지 2003년 2월호)라고 평한 것은 완전한 ‘삽살개 비평’이다. 나아가 “전형의 양식화라고 해도 좋을 법식화된 틀을 깨어버림으로써 김현자는 정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창조의 법식에서도 초탈의 경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라는 표현까지 덧붙였다. 이것은 김현자씨가 아예 살아있는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다. 비평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허풍의 수사학이 읽는 이를 실소하게 한다. 실제 무대에는 푸른 옷의 무용수들이 길게 도열해서 일제히 팔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주로 보였다. 파도의 단순한 재현이 어떻게 성기숙씨에게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넘어 해탈의 경지로까지 비쳤을까.

그는 그해 춤지 6월호에 한국창작춤 보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외연에 드러난 형식의 모양과 질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내연에 숨겨진 그늘, 그 여운”을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 관객은 “韻外之致”와 “以物觀物”의 감상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는 설명되지 않았고, 왜 김현자의 창작춤에만 그런 특별한 보기를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작 본인은 “석양이 자아내는 슬픔과 비애의 미학”이라든가 “깊은 바다에 휘감겨 있는 고통과 절망의 아픈 상처” 혹은 “바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아픔” 같은 센티멘탈리즘에 빠져 들었다. 반복적으로 ‘고통’과 ‘슬픔’ 그리고 ‘아픔’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주관적인 과도한 도취가 성기숙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됐다. 그러면서 자기모순의 파열음과 함께 무대의 실상하고 관계없는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버젓이 무용평론계에 유통되는 현상은 사라져야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지만, 무트댄스 공연에 대한 무용비평도 한가지 현상을 이룬다. 김영희 이화여대 교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트댄스는 매번 똑같은 패턴의 공연을 펼쳐왔고, 그것이 매너리즘으로 정체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무대미술과 음악, 조명을 통해 과거의 유산이 담긴 미래주의적 디자인은 일견 눈에 띈다. 하지만 그 무대가 일궈놓은 세계와 춤은 서로 배타시한다. 설치된 세계는 거의 숭고미에 가닿을 정도인데, 춤은 앙상한 패턴의 동작을 반복하고 그 단조로운 동작과 함께 자기환호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즉 여자무용수들이 마녀라는 브랜드에 흠뻑 취한 자의식 과잉에 머무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존재 미학을 위한 세트 위에서 지극히 퇴행적인 표현주의의 춤을 추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지난 무트댄스 10주년 기념공연의 팜플렛에 실린 유수한 평론가들의 글은 이러한 언밸런스에 질끈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된다. 가령, “깊은 호흡과 함께 신체를 웅크린 채 뒤로, 혹은 수직으로 극대로 확장하여 쓰는 움직임과, 정지/이동의 사이에 돌발적 튕김이나 뻗침의 움직임”(김태원)이란 평은 지나치게 부분적인 춤사위에 물신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런 동작들이 무한반복 되면서 전혀 차이 없이 매끈하게 무의미한 스타일로 전락하는 현상은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동작의 시니피앙이 열려지지 못한 채 교조화되는 것은 지적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화려하게 변화하는 총체예술미를 연출한다”는 전제하에 “이 작품(‘내 안의 내가’) 역시 죽음을 통한 삶의 탐구였다. 내안의 나를 찾는 길은 죽음의 길이다. 죽어서 삶을 얻는다. 그 어둠의 과정을 군무로 표현했다”(김경애)는 평의 이면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일본의 부토처럼 죽음을 향해 삶의 동작들을 휘발시키며 앙상하게 만드는 미니멀리즘이 있다. 하지만 부토가 그럼으로써 신체 그 자체를 ‘개시’하는 것에 반해, 무트댄스는 죽음을 단순히 ‘재현’하는 선에 그친다. 그러니까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죽음의 미학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화석화된 매너리즘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무트댄스는 김영희 교수 외에 많은 제자들도 공연을 하지만, 모든 공연이 컨베이어벨트를 거친 것처럼 동일한 것의 반복에 머물고 있다. 무대는 개구리알과 같은 생명의 현장이 영상으로 보이거나 몇 개의 현을 네온으로 표현하지만, 그런 이국적인 세계 속에서 춤은 늘 약간은 제의적이고 약간은 귀기를 염탐하는 동작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 패턴은 의미를 향해 교직되지 않고, 단순한 체계를 앙상하게 반복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의식 과잉이며 엄숙주의에 젖어 있어 전혀 그로테스크하지 않고 단지 식상할 따름이다. 이러한 무대 현상을 두고 “한국무용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혁명가”(유인화)라거나 “현대춤보다 앞서가는 현대성을 구가하는 몇 안되는 안무가 중의 한 사람”(김경애)이라고 상찬하는 것은 거의 실재와 관련없는 우상숭배에 가까운 일이다.

동일한 것의 반복, 즉 영원회귀는 니체에겐 삶의 철저한 긍정이었지만, 한국창작춤에서는 악몽이다. 오래된 가치의 자기동일적인 세계를 무한반복하는 춤을 추면서 정작 이 시대를 외면하는 안무가도 문제지만, 그런 안무가를 상찬하는 평론가도 각성해야 한다. 오래된 가치의 재검토 없이, 탈마법화 탈신화화 없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확신범의 태도일 수는 있어도 평론가의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法古創新이 자꾸만 ‘법고’로 수렴되어 새로운 창작의 활로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단계 한국 무용계의 가장 큰 문제다. 옛것과 단절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독일의 탄츠테아터(춤연극)나 일본의 부토는 연속성과 단절에 대한 상념을 더욱 깊게 한다. 문화이식론이나 전통단절론에 대한 반대가 문화 식민주의와 관련해서는 상식일 수 있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단절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운명 아닐까. 시대와 통하여 흐르기 위해서는.
 
김남수 /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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