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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유희에서 내려오기…현실에 빚을 갚는 비평
지적 유희에서 내려오기…현실에 빚을 갚는 비평
  • 안현효 대구대
  • 승인 2006.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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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서의 비평정신

필자가 경제학에 입문한 것은 공식적인 경로와 비공식적인 경로라는 두 가지 길을 통해서였다. 공식적인 경로는 조순의 ‘경제학원론’을 교과서로 한 경제원론 과목이었고 비공식적인 경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영어본을 교과서로 한 경제학 강독모임이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케인즈의 ‘일반이론’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서 나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나 틀릴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는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오늘날의 경제학이 경제공학으로 변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담론과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공학으로 훈련된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자로서 자격증을 받은 이후에는 명시적, 암시적으로 정치·경제적 요소들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경제학을 직업으로 생각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비평이라는 차원에서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사건은 1990년대의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이라고 본다. ‘사구체논쟁’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렸던 당시의 논란은 깊게 또는 넓게 재검토해 볼 가치가 있겠지만,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그 본질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규정하고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고 박현채 교수 ©
당시의 논쟁을 좀 순화시켜 표현하면 한국경제의 위상과 과제를 진보적 시각에서 규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 논쟁은 학문적 경제학이 어떻게 현실의 삶과 결합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논쟁의 내적 논리는 조야할지 모르지만 이때 사용된 경제학적 분석은 구체적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논쟁의 주체는 1980년대의 운동권, 재야학계 그리고 진보학계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경제학이 현실과 괴리된 채 자기 논리를 구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경제학의 실천성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그 논쟁에 한마디 한 정도 이상은 더 이상 깊이 관여한 바 없다. 다만 그 때의 경험은 필자의 이후 경제학 공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현실과 상관없는 지적 유희를 하고 있을 때에도 언젠가는 이 길로 되돌아가야겠다, 또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그것이다.

나는 경제학을 할 때 내가 어떤 경제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항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을 해왔다. 그 쟁점들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고, 나는 이로부터 항상 새로운 것을 배웠다. 내가 이 쟁점들에 무엇인가를 기여했다면, 요약하고 정리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현실로부터 배운다. 언젠가는 이러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필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우리 사회로부터 빚이 없는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경제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해야 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이 비록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 부류는 자신이 배운 경제학의 논리 속에서 산다. 두 번째 부류는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공학도이다. 세 번째 부류는 현실 경제로부터 직접적인 수혜를 받는다. 이 세 가지 부류는 한 사람의 경제학자가 행하는 세 가지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부류는 더 낫고, 어떤 부류는 더 문제라는 식으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무엇을 방향으로 하느냐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특수한 상업·제조업 분야에서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다르고, 심지어는 상반되기까지 하다 … 이러한 계급이 제안하는 어떤 새로운 상업적 법률, 규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며, 매우 진지하고 주의깊게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 채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제안은 그들이 이익이 결코 정확히 사회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계급, 그리고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며 따라서 수많은 기회에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주의와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역설한 아담 스미스가 이 문장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경제학은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거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면서 고고한 학문의 세계에 살지 말고, 차라리 경제학의 방향이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한국에서 경제학이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전제라고 본다. 계급이익의 존재를 인정한 후 사회의 이익에 대해 논의한다면 한국의 경제학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한 후, 필자가 절실히 느낀 것은 더 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경제학은 도입 이래 양과 질적인 면에서 큰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나 현실의 경제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경제학, 즉 토착화한 경제학에는 아직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서양의 토양에서 나온 경제학 이론 자체를 우리의 특수성에 맞게 재구성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현실에의 개입과 비평과정을 통해 시사점과 방향을 부여받을 수도 있다.

 

▲안현효 / 대구대·경제학 ©
필자는 서울대에서 ‘현대자본주의 화폐동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개혁의 길’, ‘스티글리츠의 거시경제학’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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