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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인정받은 ‘이슬람의 기사’
그리스도교 인정받은 ‘이슬람의 기사’
  • 김응종
  • 승인 2022.09.3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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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㉘_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사학
프랑스의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살라딘의 삽화이다. 사진=위키피디아

살라딘은 1137년에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의 쿠르드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쿠르드족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셀주크 튀르크에 복속돼 있었다. 그런데 그 변방 출신 살라딘이 수니파의 시리아와 시아파의 이집트를 통일하고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기사’로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그는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살라딘의 다음 목표는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1187년의 하틴 전투에서 그리스도교 연합군을 대파하고 1만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협정을 위반하여 전쟁의 발단이 된 안티오키아 공작 르노 드 샤티옹은 분노한 살라딘이 직접 처형했다. 포로 가운데 230명의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기사들은 관례대로 처형했고, 보병들은 노예로 매각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 ‘신성한 땅’의 제후들, 성전기사단장 리드포르는 살려줬다. 아마도 정치적인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살라딘은 곧이어 예루살렘 공격에 나섰다.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은 “도랑처럼 흐르는 피가 발목까지 닿았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잔인했지만, 1187년 10월 살라딘의 예루살렘 수복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협정에 의해 주민들은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살라딘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직접 몸값을 내주는 등 관용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살라딘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성묘교회에 손대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살라딘은 독실한 수니파 이슬람교도였다. 그는 바위돔의 황금십자가를 제거했고, 미흐랍을 가리는 벽을 파괴했으며, 솔로몬 성전을 알아크사 모스크로 되돌려놓았다. 

‘이슬람의 기사’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와의 대결에서도 잘 나타났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이 계기가 돼 결성된 제3차 십자군의 주역으로서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하는 용맹스러운 기사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앞까지 진격했으나, 리처드는 내분과 물자 부족 때문에 무력으로 성지를 탈환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고 귀향길에 올랐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존경심을 표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승부를 결정짓자고 말했고, 살라딘은 내가 이 땅을 누군가에게 잃어야 한다면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잃고 싶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살라딘이 1193년 3월에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야 유수프가 그의 감옥에서 해방되는구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관대한 정치가였다. 그가 포로를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긴 것은 당시로서는 전혀 이례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이례적인 행위는 적에게 관용을 베풀어준 것이다. 전사로서의 용맹함과 신앙인으로서의 관용정신을 겸비한 살라딘은 ‘이슬람의 기사’라는 영예를 부여받았다. 14세기 초 단테는 『신곡』에서 살라딘을 지옥이 아닌 림보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있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시켰다. 

계몽주의 시대 독일의 작가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은 살라딘을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군주의 모범으로 여긴 서양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적에게 관대했던 살라딘보다는 엄격한 전사의 모습을 보인 몽골 항쟁의 영웅 바이바르스를 더 높게 평가해 왔다. 살라딘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한 것은 후대에 와서야 주목받았다. 

우리나라는 이슬람 세계와 직접 접촉한 역사가 없으면서도 무슬림을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든 잔혹한 광신자요 테러리스트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무슬림이 그리스도교도들에 비해 관용적이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살라딘의 관용과 휴머니즘이 무슬림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바꾸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김응종 충남대 명예교수(사학)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후 프랑스 낭트대에서 석사, 프랑쉬콩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충남대 평생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푸른역사, 2005),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서양사개념어 사전』(살림, 2008), 『관용의 역사』(푸른역사, 2014),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푸른역사, 2022)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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