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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에 도전하는 문학
재현에 도전하는 문학
  • 최승우
  • 승인 2022.09.23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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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P. 한스콤 지음 | 오선민 옮김 | 소명출판 | 345쪽

재현의 정치성
말은 의도를 품고 글은 현실을 품는다! 우리는 언어의 의사소통적 모델에 기대어 생활합니다. 언어란 투명한 매체여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잉여 없고 누락 없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 ‘의사소통 모델’의 전제이지요. 이런 의사소통 모델에 바탕을 둔 언어를 ‘재현의 언어’라고 합니다. re-presentation, 즉 현실을 다시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관은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 모델 하에서 일어나는 일을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발화자는 자기 할 말의 내용을 먼저 확정하게 됩니다. 의도는 공공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알아서 마구 떠드는 것으로 ‘의사소통’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서로가 알만한 내용을 나눈다는 전제 하에서 그 의도의 진정성은 용인됩니다. 말과 글이 포착해야 할 것이 개인의 의도 이전에 미리 작동하는 것이지요. 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쓴다고들 하지만, 써야 할 현실은 정해져 있습니다. 동아시아 근대가 ‘번역된 근대’(리디아 리우)였던 점을 다시 한 번 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 이후, 서양 문학사가 규범으로 제시한 글쓰기는 두 가지입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지요. 둘 모두 의사소통 모델에 입각한 것이고, 전자가 ‘있는 그대로’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있는 그대로를 비틀고 변형시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둘 모두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여, 이러한 전제를 자명하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말하고 쓰는 사람은 ‘마땅한 현실’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재현하는 언어란 있어야만 하는 현실을 옹립하기에 바쁜 언어인 것입니다.

그런 언어에 사로잡혀 살게 되면, 당위와 의무로만 일상을 채워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재현에 도전하는 문학』은 식민지의 언어적 정치성을 질문하는 책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저자와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언어의 가능성, 읽어내고 표현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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