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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여, 등불을 들어라!
지식인이여, 등불을 들어라!
  • 김선진
  • 승인 2022.09.29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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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의 재미_『지식인의 배반』 | 쥘리앙 방다 지음 | 노서경 옮김 | 이제이북스 | 288쪽

‘교수’의 어원은 권력 앞에서 말하는 사람
지식인은 사회의 파수꾼이자 지성의 수호자

현 대통령 부인의 박사 학위 논문에 대한 표절 논쟁이 뜨겁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무엇보다 소위 지성의 상아탑인 대학, 지식인을 대표하는 교수들의 대응에 많은 시민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대학이 학문의 권위를 갖는 것은 학위 논문을 검증할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교수는 그 어떤 이해관계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적 양심에 입각해 엄격하게 논문을 심사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심지어 박사학위 논문의 경우 심사 절차만 봐도 외부 위원 2인에 내부 위원 3인으로 총 5인의 심사위원이 참여하는 3심의 검증을 통과해야 ‘박사’라는 칭호를 수여받을 수 있다.

 

범학계 검증단은 지난해 9월 9명의 검증단을 구성해 검증을 시작했으나 국민대가 자체 검증을 하자 활동을 보류했다. 그러나 지난달 1일 검증이 상식 밖의 검증 결과가 나오자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교수신문 DB

만약 이런 절차에도 불구하고 논문 표절 가능성이 제기된다면 연구윤리위원회에서 표절 여부를 심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모 대학은 표절 여부 재심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교수 대상 설문조사와 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처음부터 투표 결과가 예상되기도 했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투표를 한다는 것은 대학이 스스로 학문적 전문성과 양심이라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더 어이없는 것은 문제제기된 논문 검증을 하지 않겠다는 투표 결과를 자칭 ‘집단지성의 결과’라고 평가한 것이다.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라 여기는 지식인의 신조가 무색해진다.

쥘리앙 방다의 『지식인의 배반』은 믿음이 의지할 곳을 잃은 공황 상태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금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곱씹어 읽어볼만한 책이다. 프랑스 철학자인  저자 방다(Julien Benda)(1867~1956)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금서 작가에 오를 정도로 프랑스의 저항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이 책은 1927년에 처음 출간된 후 1946년 장문의 서문을 추가해 다시 출판됐다.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20세기 초라는 격동의 시간 속에서 저자는 파시즘과 나찌즘이 자행한 수많은 비인륜적 폭력이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의 배반을 목격하고 이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고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이 책이 재출간된 이유는 저자가 그렇게 우려했던 지식인의 배반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만 139만명이나 희생되었던 1차 대전의 참혹한 실상과 그 이후의 또다시 시작된 전쟁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스스럼없이 동조하고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해 느꼈던 좌절과 환멸이 1946년 판 서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미망

이 책에서 저자는 무엇보다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미망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지식인’이란 이익, 명예, 권력과 같은 현실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대신 예술이나 학문,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지성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지식인이 수호하고 전파해야 할 지성적 가치란 시공을 초월해 불변하는 보편적 가치들로서 어떠한 현실적인 목적과도 상관없는 자기목적성(autotelic)을 띨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이 정의와 진리 그리고 이성을 존중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책무와 보편적 가치의 수호자가 되기를 저버리고 사회주의, 반유태주의, 국수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념과 세속적 가치들을 위한 투사가 됨으로써 지성적 가치들을 배반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믿었던 사람의 배반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누구든 충격적이고 고통스런 일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저자가 지식인의 배반을 달리 보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인들의 타락보다  사회의 지성과 도덕과 윤리를 책임지는 집단의 타락이 더 해롭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배반은 다른 직업이나 계층의 배반과 비교하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지식인의 배반을 특히 경계한 이유는 첫째, 지식인은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성찰하는 것을 업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로서 마땅히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자인 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은 지식인을 ‘사회의 파수꾼’이라 했다. 지식인의 정체성은 밥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사는 것에 있다. 둘째, 지식인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속한 특수한 계급의 이익에 봉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셋째, 그럼에도 지식인이 지성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배반한다면 그는 이미 일반인과 달리 잘못됨을 알고도 저질렀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로 전락한 교수의 위상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대학이 직업인 양성기관으로 전락하고 교수라는 직업이 일반 기업의 월급쟁이와 같은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입을 다물든, 적극적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권력의 편에 서 부역자가 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학이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지 못한다면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대학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직업과 달리 교수에게 정년보장(tenure)의 특권을 주는 이유는 어떤 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두려움없이 지식인의 역할을 다하라는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교수를 교수(professor)라 부르는 이유도 ‘권력 앞에서(pro)’, ‘말하는(fess)’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진정한 지식인들이란 화형에 처해지거나 추방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대한민국의 교수들이여. 자신을 지식인이라 생각한다면 저자의 말대로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진 못할망정 최소한 자신의 이름과 양심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김선진
경성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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