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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김수근은 훌륭하다"…선정성 유감
"그래도 김수근은 훌륭하다"…선정성 유감
  • 강혁 경성대
  • 승인 2006.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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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_김수근 건축에 대한 비평적 입장(교수신문 제389호를 읽고)

지난호(389호) 교수신문을 받아든 필자는 몹시 당황했다. 필자의 논문이 ‘쟁점’ 꼭지로 제법 무게 있게 인용됐는데 원래 의도와는 상당히 ‘각색’된 내용이어서였다. 타이틀은 “김수근 건축 ‘또’ 도마에 올라”에다 큰 제목으로 “스승 요시무라의 것 그대로 답습 수준”으로 돼있었다. 누구나 제목을 보면 한국 근대가 낳은 대표 건축가인 김수근의 작품세계가 평생 요시무라의 것을 답습한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원래 글에는 그의 일본 유학시절 대학원 과제안이 그렇다는 사소한 지적이었다. 기사를 본 필자로선 김수근을 위한 변명이라도 써야할 것 같은 강박감을 느꼈다.  

필자는 지난 386호(2월 20일자) 교수신문 ‘비평’ 특집에 김수근이 창간한 ‘공간’지 40주년을 회고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때 제시한 제목이 “[空間]에서 [SPACE]’에로”였다. 물론 거기엔 현재의 ‘공간’지에 대한 약간의 비판적 뉘앙스가 담겨있긴 했지만 단순한 사실로서 역사적 변화를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받아본 신문에는 “[공간]은 간데없고 [SPACE]만 남아”로 돼있었다. 필자의 동의를 거치지도 않은 그런 제목변경이나, 고인의 평생의 활동에 대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지난 호의 제목에서 필자는 저널리즘의 선정주의를 읽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교수신문을 애독하는 건 시중의 신문들과는 격이 다른 지성적 접근과 비판적 입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교수신문조차 때로는 선정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 우려스럽다. 최근 교수신문을 보다보면 자극적인 제목들이 눈에 띤다. 독자의 주의, 혹은 흥미를 끌기위한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교수신문이라면 좀 더 차갑고 중립적이어도 좋지 않을까. 교수신문은 무엇보다 독자의 수준을 믿어주는 게 필요할 것 같다.

필자가 “김수근 건축의 일본적 영향”을 쓴 의도는 그의 건축에 스민 일본 건축문화의 영향을 들춰내어 일방적으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 낳은 걸출한 건축가 김수근의 건축 세계에 그가 유학한 일본 근대건축의 영향이 엿보인다는 것은 건축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반 독자가 읽으면 교수신문의 기사는 새삼 그의 감춰진 면모가 이제야 벗겨진 것처럼 오해할 여지가 크다. 더욱이 신문에 인용한 단편적 문장들이 연결되면서 그가 식민성에 매몰된 건축가로 인식될까 두렵다.

물론 김수근 건축의 기원으로 일본적 영향이 있다. 그러나 김수근 본인이 자신의 그러한 태생적 한계를 자각하고 그 극복과 한국성의 탐색을 목표로 삶의 후반 작업을 매진했음도 지적해야 한다. 모더니스트로서 그의 활동과 성과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러한 각성에서 출발한 작가적 자의식과 잊었던 자아(전통)의 탐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 근대화의 부인할 수 없는 동인이자 일그러진 근대성의 원인이며, 동시에 대타 의식을 불러일으켜 해방 이후 우리 근대의 건축적 자아를 추구하게 한 복잡한 타자로 작동한다. 김수근 건축의 성취와 한계가 우리에게 주는 한 교훈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건축계가 아직까지도 제도이자 문화로서 일본의 영향을 내면화한 채 제대로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강혁 / 경성대·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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