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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신체를 통해본 역사
[책들의 풍경] 신체를 통해본 역사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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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5:42:27
이건 ‘신드롬‘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TV를 켜면 어김없이 대하사극이요, 신문에선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과 관련한 학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의 반응이 연일 소개된다. 인문과학분야 베스트셀러는 3분의 1 이상이 역사관련서다. 대체 어찌된 셈인가. 강단을 떠도는 ‘역사학 위기론’이 괜한 엄살에 불과했더란 말인가.

“사소한 역사가 좋다”
문화의 ‘복고화’ 바람을 타고 고전과 역사물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했다는 진단도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설탕의 역사’ ‘담배의 역사’ 같은 이른바 ‘잡학사전식’ 역사서들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딱딱하고 지루한 강단 역사학과 낯설고 난해한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틈새를 비집고 이른바 ‘문화사’의 형식을 차용한 취미서들이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셈이다. 최근 선보인 책들 가운데는 ‘얼굴의 역사’ ‘자궁의 역사’ ‘기형의 역사’가 눈에 띤다. 세 권 모두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얼굴의 역사’(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刊)는 조각과 회화, 사진과 영화에 나타난 얼굴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는 프랑스의 여성작가.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 20세기 추상예술, 그리고 성형수술이 보편화된 이 포스트모던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천5백여년에 이르는 ‘얼굴의 예술사’를 마치 ‘단편연작소설을 써내려가듯’ 기술해 놓았다. 소설이라 부르자니 이야기가 없고, 역사서라 하기엔 문체의 기교가 지나치다. 단일주제가 분명하니 상식서라 부르기도 어색하다. 말하자면 이책은 소설과 역사책, 상식교양서의 경계선 상에 교묘하게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파이움의 초상화(1∼3세기 이집트에서 그려진 장례용 초상화)에 대한 저자의 묘사를 일별해 보자.
“파이움의 초상화들 중에서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얼굴이 있다. 나는 그녀를 ‘아름다운 베네치아 여인’이라 부르려 한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슬픈 기운이 느껴진다. 눈썹은 놀란 듯이 파르르 떨고 있다. 도톰한 입술은 조심스런 붓질로 그려졌다. 과시하려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극도로 감추려는 아름다움이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총독의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배우가 되었더라면 그레타 가르보처럼 ‘페이스’란 별명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자궁의 역사’(백영미 옮김, 아침이슬 刊)는 여성의 수난사를 다룬 책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궁일까. 간단하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심리적 억압이 자궁이란 신체기관을 통해 집중적으로 행사되어왔다고 보는 까닭이다. 따라서 저자가 볼 때 자궁의 수난사는 여성의 수난사에 다름 아니다. ‘개체의 역사를 통해 역사의 전체상을 보여준다’는 미시사의 방법론에 비교적 충실한 셈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궁의 수난사는 ‘설마 그랬을까’ 싶을 만큼 황당무계하고 때론 섬뜩하기까지 하다. 플라톤은 자궁을 “아이를 생산하고 싶어하는 짐승 안의 짐승”이라 규정했다. 덧붙여 그는 이 자궁을 오랫동안 방치해놓을 경우 “몹시 괴로워하며 몸 속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질환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여성의 자궁이 ‘열이 부족해’ 몸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음낭, ‘뒤집힌 음낭’으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돌출된 여성의 음핵이 음탕한 마녀의 상징으로 간주돼 마녀사냥꾼의 표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저자는 이처럼 여성적 열등함의 상징이자 온갖 질병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온 자궁의 슬픈 역사를 통해 의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이 왜곡한 ‘여자의 문화사’를 차갑게 드러낸다.
‘기형의 역사’(이내금 옮김, 자작 刊)는 저자가 의사다. 따라서 이 책은 기형을 문화사적 측면에서 다루기보다 ‘기형학’이라는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요컨대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했던 ‘신화적 기형’에서부터 근대 이전의 예술작품, 그리고 현대의 해부학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지식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형이 어떠한 존재들로 인식되고 수용되었는지에 대한 문화사적 설명과 함께 기형의 유형과 발생원인에 대한 의학적 설명, 다양한 도판과 사진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한 배려도 엿보인다. 하지만 호기심을 채워주는 단순한 잡학서 이상의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현상 전반을 포괄하는 문화사적 성찰의 두께가 부재한 탓이다.

여전히 유효한 ‘집합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신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세 권의 책이지만 각각의 질감과 무게는 상이하다. 대안적 문화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 있는가 하면, 대중들의 호기심에 영합하려는 상업적 의도가 두드러진 것도 있다. 물론 사람들이 역사적 지식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언술을 통한 지배욕’과 무관하지 않다. 객관성으로 포장된 역사 지식이야말로 일상적 대화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과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원초적 호기심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서를 찾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역사가 권력의 자원이나 호기심의 대상이기에 앞서 현재의 삶과 사고에 지표를 제공하는 ‘집합적 기억’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우리는 그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정체성을 만들고 사고하며 행동한다. 최근 서점가에 일고 있는 ‘잡학역사서’의 인기를 무턱대고 반길 일만은 아닌 셈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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