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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6] 19세기 전반의 사탄과 19세기 후반의 성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06] 19세기 전반의 사탄과 19세기 후반의 성자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9.13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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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크로포트킨 – 코뮌주의의 사회적 아나키스트
단재 신채호는 크로포트킨을 인류의 5대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보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신채호는 45세가 된 1925년에 쓴 「낭객의 신년 만필」에서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라고 하며 석가, 공자, 예수, 마르크스와 함께 크로포트킨을 인류의 5대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보았다. 20세기 초에 아나키즘은 바쿠닌이 아니라 크로포트킨으로 대변되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20세기 전후에는 범세계적으로 아나키즘은 크로포트킨의 영향하에 있었다. 심지어 신채호처럼 크로포트킨은 성인으로 받들어지기도 한 인격자였다. 남을 비꼬기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개인으로서 크로포트킨은 성자라고 부를만큼 다정하고 그의 복슬복슬한 붉은 수염과 사랑스러운 표현은 디렉터블산의 양치기 모습이 확연했다”라고 찬양했다. 디렉터블산은 버년의 「천로역정」 제2부에 나오는 성스러운 산이다. 

바쿠닌의 음모와 크로포트킨의 토론

많은 이들이 크로포트킨을 성인으로 부르는 반면 바쿠닌은 사탄(악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만큼 달랐다. 크로포트킨은 1872년 봄에 스위스를 여행했는데 그때 바쿠닌도 스위스에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아직 무명이었지만 바쿠닌은 유명했다. 그러니 크로포트킨이 바쿠닌을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네차예프로 인해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한 바쿠닌 측에서 만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크로포트킨은 그해 여름에 러시아로 돌아가 감옥 생활을 하다가 1877년에 스위스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바쿠닌이 죽은 뒤여서 만날 수 없었다. 크로포트킨이 바쿠닌을 찾지 않은 이유는 두 사람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미리 잘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장 큰 차이는 바쿠닌이 평생을 혁명가로 살았던 반면,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혁명에 뛰어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바쿠닌은 혁명을 위한 어둡고 로맨틱한 음모도 서슴지 않았지만 크로포트킨은 밝고 공개적인 토론을 즐겼다. 또한 두 사람이 폭력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바쿠닌이 피와 불꽃의 파괴를 상징한다면 크로포트킨은 상호협력에 근거한 건전한 아나키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바쿠닌은 평생을 혁명가로 살았다면, 크로포트킨은 혁명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혁명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혁명의 와중에서 느낀 대로 휘갈겨 썼다면 크로포트킨은 과학적 지성과 불굴의 낙관주의자로서 체계적인 이론서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유럽 각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당시 바쿠닌에게는 현상금이 걸렸지만, 크로포트킨은 무자비한 짜르에게 명예롭게 추방된 러시아의 대표적 지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관념주의자 바쿠닌과 과학자 크로포트킨

이러한 차이는 바쿠닌이 주로 19세기 전반기, 크로포트킨 19세기 후반기를 살았다는 시간적 차이와도 관련되었다. 바쿠닌은 주로 헤겔주의의 영향을 받은 관념주의자였던 반면 크로포트킨은 다윈을 비롯한 당대 첨단 과학에 동참한 과학자였다. 물론 바쿠닌도 유물관을 믿었고 다윈주의적 진보를 신봉했으며 국제주의자였지만 철저한 과학정신보다는 헤겔적인 신비주의나 민족주의를 버리지 못했다. 

물론 두 사람은 아나키스트로서의 생각을 공유했다. 불평등과 국가라는 부정의 세계를 파괴하고 새롭게 평화로운 우애의 사회를 세우고자 한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비밀결사와 소규모 폭동이라는 바쿠닌의 방법론은 크로포트킨에게는 수용되지 못했다. 바쿠닌을 이은 아나키스트들은 크로포트킨이 아니라, 말라테스타와 같은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반면 크로포트킨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책을 썼다. 그것도 바쿠닌의 글과는 달리 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이었다. 그의 글만이 아니라 인격 자체가 고귀하고 순결했다. 물론 바쿠닌의 글도 과학적이고 낙천적인 크로포트킨의 글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이 있었다. 

크로포트킨의 글은 바쿠닌의 글과는 달리 논리적이고 명쾌했다. 그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또 책을 씨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의 글은 바쿠닌의 글과는 달리 논리적이고 명쾌했다. 그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또 책을 씨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럼에도 프루동이나 바쿠닌도 사용하지 않은 아나키즘이나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크로포트킨이 최초로 사용한 점에서 그를 현대 아나키즘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또한 현대 아나키즘의 주류가 된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창시자가 크로포트킨이다. 이는 바쿠닌파의 집산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바쿠닌이 죽고 난 뒤 바쿠닌파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자신들의 아나키즘을 집산주의(collectivism)라고 불렀다. 그것도 사회에 의한 공유화에 의해 그 사회를 운영해간다는 점에서 국가주의는 아니다. 

그 특징은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그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공산주의와 같은 점이지만 그 구성단위가 서로 다르다. 즉 무정부인가 정부인가 라는 차이다. 반면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코뮤니즘은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그 욕구에 따라 받는다”는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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