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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봉 화도시선
회봉 화도시선
  • 최승우
  • 승인 2022.09.0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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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겸진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41쪽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하겸진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1870년 진주(晋州) 사곡리(士谷里)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해 위정척사 운동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후에 회봉은 파리 장서 사건과 2차 유림단 사건에 관여해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도(道)를 부지하고 지켜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망국이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회봉은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을 항일과 저술 활동, 후학 양성으로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그의 의식들은 문학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문학의 종장을 갈무리하는 문학적 결정으로 승화되었다.
 

화도시(和陶詩)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송대 동파 소식이 처음 시도한 시 형식이다. 소식이 화도시를 처음 지은 이후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이 화도시를 창작했으며, 한시의 다양한 형식 속에서 화도시라는 한 영역을 구축하고 그 창작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고려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의고화도(擬古和陶)> 4수에서 시작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상촌(象村) 신흠(申欽),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극원(屐園) 이만수(李晩秀) 등이 화도시를 썼으며, 조선에 들어서는 이황, 김종직, 송시열 등도 그 창작 대열에 합류했다. 이 전통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에 의해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화도시 120수가 지어졌다.
 
소식은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그의 지조 있고 청렴한 ‘고궁절(固窮節)’의 삶을 동경했다. 하겸진은 <화도시> 서문에서 자신도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며, 소식이 도연명의 시를 화운한 것을 따라 보고자 화도시를 짓게 되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지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화도시’로 만난 하겸진과 소식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가감 없이 담아내었다. ‘화도시’는 이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 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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