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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단절을 거슬러 오르는 ‘홍색여행’
40년의 단절을 거슬러 오르는 ‘홍색여행’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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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이중의 중국 산책-첫 회

오늘의 중국은 우리 한국인에게 여러모로 낯선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이 아는 것 같고, 매우 친숙한 느낌마저 갖는다. 孔孟과 李杜를 알기 때문일까. 오랜 시간, 문화와 역사를 함께 한 친근감과, 유교문화를 통한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 때문일까. 특히 재미있는 것은, 공산중국에 대한 상당한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불편을 느낀다거나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전쟁이 났다. 그 무렵 나는 친구 집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 옆방에 국어 선생님 한 분이 하숙을 하고 계셨는데, 커다란 모택동(毛澤東)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있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쟁이 나면서 뿔뿔이 헤어졌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나서 대구에서 그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고등학교 선후배 동창들이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다행히도 나를 알아보셔서 고맙고 반가웠다. 그 분은 대구의 어느 신용금고 이사장이었고, 나는 한국조폐공사의 임원이었다.

그 전쟁에 모택동의 중국이 참전했다. 그의 아들이 목숨을 잃었고, 나의 형님도 평북 초산에서 전사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르며,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3년 한중(韓中)수교가 이루어지기까지 두 나라 사이는 ‘단절’과 ‘적대’의 관계였다. 상대방에 대한 지식과 정보, 그 어느 하나도 가진 것 없이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던 것이다. 한국인에게 오늘의 중국은 오래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친구 같은 존재이다.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기나긴 세월 동안, 제각기 살아온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갖고 있다. 체제와 이념, 관습과 의식, 지향과 전략,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서로 다른 사연들이다. 이 사연들을 서로가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야만 진짜로 친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를 덥석 껴안아 버렸다. 당연히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오랜 친구였다는 듯이.

중국 산하 도처엔 공산혁명의 근거지들이 산재해 있다. 이런 곳을 탐방하는 것을 ‘紅色여행’이라 한다. 이것은 중국의 사회교육, 정치교육의 중요한 골간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중국혁명의 성지로 井岡山과 延安, 西柏坡 등을 꼽을 수 있다. 정강산은 모택동 농민혁명의 최초 거점이었으며, 연안은 중국공산당의 10여년에 걸친 요새요 수도였다. 서백파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 호금도(胡錦濤)가 국가주석이 되고나서 맨 처음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2002년 2월까지 만 5년간 중국 연변에 살면서 나는 방학이면 배낭을 메고 주로 ‘홍색여행’을 다녔다. 50년 가까운 두 나라 간의 공백과 단절을 나는, 발로 뛰고 눈으로 보는 ‘홍색여행’을 통해 메울 생각을 한 것이다. 기차와 버스로 2만 여 킬로에 걸친 중국 여행을 했다.

중국의 지식인들, 당료나 관료들을 만나보면 나의 어설픈 여행 지식이 매우 값지다는 걸 알게 된다. 홍색여행의 낙수들이 나름으로 효과를 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의 중국공산당을 하나의 통치 메커니즘으로 파악한다. 일당독재니, 노동자, 농민의 대표성 같은 것은 실질적으로 폐기된 지 오래다. 이름만 ‘홍색’이지 이념상의 붉은 빛깔은 ‘시장경제’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만났을 때, 정강산을 이야기하고, 모택동의 시를 인용하고, 주은래(周恩來)가 좋아했던, 노신(魯迅)의 시 ‘孺子牛’를 외우면 그들은 아주 반가워한다.

요즘 한국의 관광객들은 중국 천지 안 가는 데가 없다. 그러면서도 중국 곳곳에, 현재로서는 잘 다듬어져 있는 수많은 공산혁명의 유적과 파편들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나만 해도 처음 重慶에 갔을 때, 볼 것이 없다는 지레짐작으로 중경임시정부 청사나 다녀오고, 장강 船遊에 나설 생각이었다. 중경에서 상해까지 유람선을 타고 가는, 선상 6박7일의 환상적인 코스에 잔뜩 매료되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중경서 등소평의 고향 광안까지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고, 紅岩村이니 사재동이니 하여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얽히고설킨 역사의 흔적이 적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청나라에서 곧바로 대만의 국민당 정부로 이어졌다. 그러한 우리의 시각은  1993년까지 변하지 않았었다. 대륙이 문화대혁명이란 홍역을 치를 때, 한국은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 그 성장 동력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한국인의 중국 관광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떤가. 한국의 성장 모델을 거울삼아 연 평균 9%의 가공할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이다. 그들의 돌진은 무섭다. 무엇보다 그들의 팽배한 자신감이 앞으로의 중국의 향배를 가름 하게 된다. 중국의 한국 관광객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언제 역전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우리는 와있다.

중국인은 사귈수록 더 알기 어렵다고 한다, 중국이란 나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공산 중국의 역사와 흔적들을 외면하고서는 현대 중국의 오늘과 내일을 점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한국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체험이 없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접근도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그 이전, 모택동 시대의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과는 전혀 다른 가치체계에 속한다. 완전히 이질적이고, 서로 양립할 수가 없다.

오늘의 공산당 지도층은 거의가 문화혁명 때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같은 공산당이, 더구나 중국공산당 1세대라 할 등소평(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설계하고 추진했다. 전혀 이질적인, 대립되는 이념과 정책을 하나의 조직체가 추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문화대혁명을 반면교사로 삼아 역동적으로 개방과 개혁을 밀어붙여 오늘의 경제적 과실을 만끽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공산중국은 결코 중국의 유장한 역사와 단절된 존재도 아니거니와, 중화민족의 전통적이며 관례적인 지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레닌 혁명의 성공사례는 하나의 유효한 도구로 중국공산당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뿐, 모택동의 지향은 거대하고 강한 중국이며, 중국인의 자존심 회복이며, 역사에 길이 빛날 중국의 부활이었다.

모택동의 호는,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潤之였다. 또 다른 호도 하나 있었다. 子任이었다. 왜 자임이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양계초(梁啓超)의 호 任公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젊은 시절의, 아직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기 전의 모택동은, 당시의 많은, 중국의 지식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양계초를  따랐다.

19세기, 중국 봉건 말기에 양 계초는 그의 스승이기도 한 강유위(康有爲)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개량주의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망해가는 청나라 왕조에 서양의 입헌군주국 제도라는 캄플 주사를 놓아 열강 앞에 그 쇠잔한 힘이 노출되어버린 중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양계초는 한족이었고, 청나라는 만주족의 나라였다. 한족에게 있어서 만주족이나 주변 민족은 모두 오랑캐였다. 청나라를, 현실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원을 지배한 전통적인 중국 왕조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양계초는 중국의 몰락을 이민족 통치의 결과로 보았다. 그러면 그 시대의 대표적인 한족 지식인이었던 그는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읽고 있었을까. 오늘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한번쯤은 짚고 가야 할 대목이다.

<필자소개>
이중 :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상대·경원대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 ‘김수영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조폐공사 이사, 경남신문사 사장 등을 거쳐 숭실대 총장, 중국 길림성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이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여러 일간지에 고정 칼럼과 시사평론, 에세이를 다수 발표했다. 최근에는 시사 잡지에 ‘등소평 기행’, ‘주은래 기행’, ‘모택동 기행’ 등을 연재해 단행본으로도 펴냈다. 1960년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 ‘땅에서 비가 솟는다’와 에세이집 ‘이 시대의 중심 잡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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