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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이 아니라 ‘눈’
‘털’이 아니라 ‘눈’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3.1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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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동양미술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경향

지난해 겨울, 한국 미술사학계에 의미있는 논문이 한편 보고되었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가 쓴 ‘털과 눈-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의적 명제와 조형적 과제’인데 이 논문은 조선시대 초상화를 지배한 미의식을 재규명하고 있다.

▲작자 미상, ‘李采 像’, 1802, 99.2×58cm ©
▲작자 미상, ‘李縡 像’, 19세기 초, 97.9×56.4cm ©
글의 시작은 최근 타계 1주기를 맞은 미술사학자 故 오주석 씨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오 씨는 생전에 ‘이재 像’과 ‘이채 像’에 대한 남다른 주장을 했다. 두 상은 얼굴이 거의 같기 때문에 ‘이재 상’은 ‘이채 상’을 그린 10여년 뒤에 이채의 노년기 모습을 다시 그린 또 하나의 ‘이채 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기존 설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오 씨는 “그야말로 병색까지 있는 그대로 묘사된 이런 극사실 초상화에 보이는 회화 정신을 두고 옛 사람들은 ‘一毫不似 便是他人’, 즉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남이라고 했죠”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를 정면 반박했다. “만약 이재가 이채의 10년 뒤 모습이라면 귀 앞 부분의 구레나룻 숱이 더 많아졌고, 눈썹 바로 위 부분의 이마 주름 2개도 없어졌으며, 눈꼬리 윗부분의 주름도 더 줄어든 것”은 무슨 조화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따라서 조부(이재)와 손자(이채)의 두 사람 초상화로 보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강 교수는 나아가 조선 초상화의 조형적 핵심을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로 보고 ‘一毫不似’론을 그 근거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강 교수는 일호불사론이 널리 쓰인 조선 초중기에는 사실주의 회화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지만, 일호불사론이 오히려 퇴조했던 조선 후기에 사실적 초상화가 창궐했다며 어찌된 거냐고 따져 묻는다.

이런 오해는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와 해석에서 二重의 착시와 소외현상을 불렀다는 게 강 교수의 진단이다. 즉 일호불사론이 본래 초상화의 조형적 명제가 아니라 祭儀的 명제로 제기된 것임에도, 단순히 조형적 명제로만 읽은 뒤, 조선시대 초상화의 조형적 특징을 지나치게 이와 관련하여 자연주의적 사실주의처럼 편향되게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의 고유하고 특징적인 제의적 맥락도, 조형적 맥락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제의적 맥락이란 조상 제사를 모실 때 影幀을 쓰지 말고 신주를 사용하라는 유교적 엄명이다. 거의 모든 가정과 기관에서 영정을 당연시 여길 만큼 일상생활에 깊숙이 파고든 이 불교식 제사법을 유교가 넘어서야 했던 것.

말하자면 일호불사론은 초상화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한 구호였다. 강 교수는 이것을 임금을 그린 御眞의 전개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태조와 태종은 영정을 엄금했다. 그러나 다시 숙종 때부터는 사회사상사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심화되고 사회 깊숙이 저변화, 토착화되어 초상화가 제의적인 맥락과 수기적인 맥락에서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인 시각 매체로 인식됨으로써 영정을 허락할 문화적 여유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때 초상화를 지배한 조형적 명제는 ‘一毫不似’의 ‘털’이 아니라 傳神寫照의 미학적 핵심인 ‘눈’(目)에 있었다. 강 교수는 문화군주인 정조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여러 편의 초상화를 분석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인물의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은 寫形이 아니라 바로 寫心이었던 것. 그러면서 강 교수는 “神은 形을 통해 드러나므로 형을 잘 그려야만 신도 잘 그릴 수 있다는 진경시대의 사실주의론은 이 시기의 초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며 “성리학의 독특한 제의관과 정교관, 수기관, 조형관 등을 통한 문화사적 시각”이 보태져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인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부분적으로 지나친 해석이 있지만 높게 평가한다”라는 것. 그는 강 교수의 논문이 “초상화를 동아시아적 창작관습과 창작 패러다임 속에서 이해했다는 점”에 대해서 큰 호감을 표한다. 홍 교수는 “自然主義와 같은 서구 미학의 번역어로 조선 회화를 개념적으로 붙잡는다는 게 얼마나 한계가 큰 지를 잘 말해준다”라고 평했다.

강 교수의 논문 말고도 최근 미술사학계는 ‘초상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미술사학연구회 학술대회에서도 2편의 논문이 초상화에 대한 것이었다.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런 흐름에 대해 “현대미술이 추상에서 신구상 쪽으로 넘어오면서 인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정리한다. 즉 현대미술의 조류와 서양이론계의 흐름이 국내 미술사 연구에도 반영된다는 것. 둘째는 “그동안 너무 산수화만 연구”해 싫증날 때도 됐다는 것이다. 홍선표 교수는 ‘초상화’ 연구가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 전반으로 넓어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홍 교수는 그동안 한국회화사가 산수화 중심으로 개관돼 온 이유가 “1930년대에 모더니즘과 차별화하려는 조선주의가 대동아주의와 맞물려 문인화·산수화를 강조한 데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적 사유와 닮아진 옥시덴탈리즘적인 것이고, 사실 전통회화의 중심은 ‘인물화’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화원의 주요 과제가 인물화였고, 성리학은 敎化와 修己의 학문이라 인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강 교수가 앞서의 논문에서 “초상화를 단순히 양식사적으로 좁게 접근할 경우, 그 역사적 실상과 실존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듯, 인물에 대한 연구는 좀더 폭넓어져야 할 듯하다. 초기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은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가 지난 80년대부터 선구적 업적을 일구어왔다. 조인수 교수는 강 교수의 논문이 “양식사적 접근이 간과해온 다른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양식사적 연구토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양식을 연구해야 진위와 시대를 판명할 수 있기 때문인데, 세간에서 양식적 접근과 문화적 접근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기존 연구방법에 대한 강 교수의 비판은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11일 열린 미술사학연구회에서 발표된 2편의 초상화 연구가 태조 御眞에 대한 연대기적 규명 같은 실증적 차원과, 역사인물화의 재료와 형식을 구분한 양식사적 접근으로 만족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오주석 씨는 그림의 아래가 젊은 이재의 모습이고, 위가 10년 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라며 동일인물로 봤으나, 강관식 교수는 두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관찰할 때 서로 다른 인물이며, 오 씨가 ‘일호불사’론을 조선 초상화의 조형적 명제로 인식한 나머지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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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 2006-03-13 04:50:35
왼쪽 귀 앞, 볼 뒤부분에 있는 점이 똑같구료.

저 집안은 조부와 손자가 점도 똑같은 위치에 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