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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몸' 싸움의 현장
[테마]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몸' 싸움의 현장
  • 교수신문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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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5:35:06
구승회 / 동국대·윤리 문화학

왜 여자의 몸에만 억압과 고통, 사회·문화적 규범의 폭력이 가해지는 것인가. 여자가 몸으로부터 해방되면 안되는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은 “여성들의 몸은 가부장적 사회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주체성의 산실”로 만들어내고 있으며, “현장에서 이슈가 되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여러 해 동안의 경험적 연구를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애 낳는 기계에서 해방되는 줄 알았던, 섹슈얼리티(성)로 치장한 여자의 몸이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각인된 장이며, 다양한 문화권력의 각축장”임을 현장 검증을 통해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현장 연구들이 그렇듯이 몸-구속적인 한국 여성들의 현실을 까발기고, 폭로하는 것 이외에 더 나아가 ‘여자가 문화권력의 투기장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해방된다’는 것을 주장하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여성주의의 ‘영원한 트릴레마’
왜냐하면 저자 역시 여성주의가 안고 있는 ‘영원한 트릴레마’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자의 몸을 자연 물리적인 생물학적 조건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거부는 여자의 몸 내부적으로는 섹슈얼리티(성)와 출산을 분리하는 다소간의 해방을 가져다주었지만, 여자의 몸 밖에서는 성으로 표현되는 여자의 몸을 둘러싸고 문화적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에, 몸의 주인인 여자가 자신의 육체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부터 해방되려면 질 존스톤처럼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택하거나, 티 그레이스 엣킨스처럼 자궁 이외의 재생산 설비를 몸 밖에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여성주의가 넘어야 할,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그렇기에 여자 몸을 둘러싸고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지 ‘끊임없는 현장 생중계’로 일관할 뿐, 어쩌자는 건지에 대해 여성주의자로서의 처방전을 써 주지 않고 있다. 더욱이 현장의 목소리의 배후에 깔려 있는 성 평등을 지탱하는 하위 맥락(subcontext)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6장 ‘“아들 낳기”와 여성의 주체성’은 “아들을 낳은 여성의 주체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의 주체성은 다르다”는 “기혼 여성의 다층적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 낳은 여자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일 듯한데, 왜 많은 설명이 필요한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택했는지 궁금하다. 8장 ‘국가와 여성의 출산력’에서 국가에 의한 가족계획, 피임, 출산 통제 등은 여자들로 하여금 “국가에 의해 자신의 몸이 새롭게 창출되는 것을 경험”하게 하였고, 출산은 여자의 욕망과 존재 이유인 동시에 여성으로 승인받는 조건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는 “여성을 생물학적 규정성에 붙들어매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이런 국가의 강제가 여자를 애 낳는 기계로부터 몸을 해방시켜준, 여성주의자가 볼 때 나쁘지 않은 결과를 비판했을 때, 져야 할 부담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행위성, 운명성, 정상성, 몸의 육체성, 재맥락화, 문화의 담론적 권력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행위성, 행위성의 성운” 등등 필자로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한글과, 주어를 길게 쓰는 문체 때문에 술어 없는 문장이 여러 곳 발견되기도 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책답게 일상적인 어휘와 평이한 문장이었으면 읽기에 더 편했을 것이다.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책의 첫줄은 “왜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첫 문장부터 나는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해 왔고, 지배하는가. 생물학적인 이성적(heterogen) 성-관계를 왜 지배라 불러야 하는가. 지배양식이 아니라, ‘협동양식’이면 안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서는 한 줄 이상 읽어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예쁜 엽서와 함께 부쳐 보낸 저자의 배려에 보답하고(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공부를 위해 ‘남자는 여자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저자를 따라 나섰다. 저자는 이런 전제하에 성적 지배의 양식들을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저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한 학자이므로 읽고, 참조한 저작도 당연히 불어권 저작일 테고, 현대 프랑스의 지적 전통에서 남녀관계를 지배관계로 해석하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을 것이다. 어디 프랑스뿐이랴! 여성, 가족, 젠더,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현대의 모든 이론들은 일단 생물학적으로 다른 개체나 집단의 관계를 ‘지배’로 이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성적 권력을 문제삼는 페미니즘이론가들은 남녀의 사랑, 친밀성, 실존적 통합을 위한 결합 따위는 사실은 모두 권력관계라고 폭로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관계, 남녀관계, 섹스하는 관계, 좋아하는 관계, 사랑하는 관계 모두를 지배와 피지배로 본다면, 이끼는 바위와, 참새는 전기줄과, 해오라기는 시냇물과, 달맞이꽃은 보름달과 … 아니,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 그 순간, 이미 지배하고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설령 지배가 역사적, 생물학적으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역사학, 정치학, 생물학은 ‘공생’, ‘협동’, ‘연대’ 등의 말로 동일한 사안을 설명해 왔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자의 여자 지배는 사실은 남자와 여자, 인간들 간의 무수한 관계 양상들 중의 ‘중요하지 않은 일부분’이 아닐까.

‘성적 탈정체화 전략’의 문제점
남녀관계에서 지배양식의 발견이 대단치 않은 발견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 그건 사랑이야!”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저자는 “사랑, 그것 역시 지배행위지!”라고 답변하고 싶을 텐데, 그렇다면 여자도 사랑을 하는데, 왜 남자만 여자를 지배하는지에 대한 논증부담을 안게 되고, 설령, ‘그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부장제적인 사회 제도 때문’이라고 하거나, ‘생물학적 차이’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끝없는 순환 논증에 빠지게 된다.
저자는 성적 지배의 일반적 구조(1장)는 남성의 지배의 욕망, 보호하고 인정을 요구하는 사랑의 관계, 이런 지배와 욕망이 안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장치된 가정,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작동하는 것으로 본다. 하여튼 이런 구조 속에서 생성된 성적 지배에서 남자는 바보같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았다고 진술한다. 그래서 저자는 (여성해방을 위한 해결책으로) 남성들이 무의식적인 성적 정체성으로부터 전향하는 것, 말하자면 ‘성적인 탈정체화’를 제안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성적 탈정체화로의 전향’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이를 ‘사내 구실 하지 말기를 맹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원래부터 남자 구실을 못하거나 몇몇의 병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턱없는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섹스금지’는―섹스만 했다하면 지배/피지배가 되기 때문에―생물학적으로도 있을 법하지 않고 인류학적, 우주-생태학적으로 ‘지배양식’보다 더 큰 범죄―왜냐하면 현재의 기술수준에서 섹스금지는 생식금지이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남성의 전향’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이 아니고, 저자의 말대로 ‘지배적 욕망으로부터 타자성의 배려로 나아가는 과정’ 정도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혹은 ‘동물성에서 영성으로의 이행’이라 하더라도, 자웅동주주의(androgynism)가 아니고서는 타자성의 배려는 ‘현실에서 언제나 지배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욕망은 가까이하면서 사랑은 멀리하는 남성들의 전략(3장)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여기에 추가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타자성을 배려한 다음 사랑하면 그것은 지배가 안 되는가. 거꾸로 동물적 지배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헌신은 타자성에 대한 배려와 구분되는가. 동물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영성으로 타자를 배려하는 것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하느냐가 정말로 해방을 위한 ‘순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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